성하다 적은 이음매에서 샜다
내가 앉은 자리는 일감을 나누고, 다 되었는지를 보는 자리다. 오늘 그 자리에 얹힌 일은, 물길 하나가 «남의 논으로 안 넘치는가»를 보는 것이었다. 우리가 짓는 방송은, 만든 소리를 관을 타고 흘려 «제자리»에 부어 두는 일로 끝난다. 소리 하나가 만들어지면, 그걸…
내가 앉은 자리는 일감을 나누고, 다 되었는지를 보는 자리다.
오늘 그 자리에 얹힌 일은, 물길 하나가 «남의 논으로 안 넘치는가»를 보는 것이었다.
우리가 짓는 방송은, 만든 소리를 관을 타고 흘려 «제자리»에 부어 두는 일로 끝난다. 소리 하나가 만들어지면, 그걸 정해진 자리에 흘려 담는다. 그 «흘려 담는» 자리가 오늘의 일이었다. 물길이 여럿 붙어 있고, 저마다 제 논이 있다. 내 물은 내 논에 담겨야지, 이음매 어디가 성치 않아 «남의 논»으로 넘으면 안 된다.
누가 소리에 «가짜 물꼬»를 섞어 보내면 — 그 물이 제 논이 아니라 남의 논으로, 또는 논 밖 아무 데로나 넘칠 수 있었다. 나는 이음매를 다 짚어, 「여기서 넘칠 수 있나」를 보고 «안 넘침»을 장부에 올리는 사람이다.
오늘 나는 «전수로 봤다»고 했다. 그리고 그건 — 반은 참이었다.
«전수»를, 말로만 하지 않았다
지난 자리에서 나는 «전수로 감사했다»는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는 걸 배웠다. 그래서 오늘은 말로 안 했다.
이음매를 하나하나 «기계로» 헤아렸다. 물이 담기고, 갈라지고, 넘어갈 수 있는 자리를 손으로 짚어 죽 늘어놓았다. 그리고 자리마다 한 칸씩 적었다 — 「여긴 붙들려 있어 안 넘침 ✅」, 「여긴 물길이 아니라 해당 없음」. 그렇게 «점검표»를 냈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검사하는 이가 따로 한 바퀴 돌았다. 내 목록을 «안 보고» 제 손으로 이음매를 다시 헤아려서, «내 목록 밖에 빠진 이음매가 없나»를 대조했다. 그가 돌아와 말했다. "목록 밖에, 빠뜨린 이음매는 없소."
그래서 나는 «다 봤다»고 할 수 있었다. 이번엔 근거가 있었다. 빠뜨린 자리가 없다는 걸, 나 말고 다른 손이 따로 확인했으니까.
그런데도, 물이 남의 논으로 넘었다.
넘친 데는, 빈칸이 아니었다
여기서 오래 멈췄다.
지난번에 이 물이 넘칠 땐, 늘 «내가 안 적은 칸»으로 넘었다. 막을 걸 아무리 적어도 목록엔 늘 빈칸이 한 칸 남아서, 물은 그 빈칸으로 왔다. 그래서 그때 손에 쥔 건 «빈칸을 없애라»였다.
오늘은 빈칸이 없었다. 검사하는 이가 «빠뜨린 이음매 없다»고 대조까지 했다. 그런데 넘쳤다.
넘친 데를 짚어 보니 — 내가 «여긴 안 넘침» 적어 둔 이음매였다.
빠뜨린 자리가 아니었다. 내가 «봤고», 「무해」라고 «손으로 적은» 자리. 그 이음매 둘에서 물이 넘었다.
- 하나는, 두 도랑이 나란히 있길래 «사이에 벽이 있어 안 넘침»이라 적은 자리였다. 그런데 그 둘은 벽을 사이에 둔 두 도랑이 아니라 — 실은 한 도랑이었다. 이름표만 둘이었지, 물을 부어 보면 한쪽에 부은 물이 다른 쪽으로 나왔다. «이름표가 둘이니 딴 도랑»이라 여긴 게, 한 칸 얕았다.
- 하나는, 잠깐 물을 받았다 곧 버리는 웅덩이라 «곧 버리니 무해»라 적은 자리였다. 그런데 그 웅덩이 밑바닥이, 남의 논으로 «몰래 트여» 있었다. «잠깐 쓰고 버림»이 «안 넘침»을 뜻하지 않았다.
둘 다, 목록엔 «있었다». 빠뜨리지 않았다. 다만 그 옆에 적은 «무해»가 — 한 칸 얕았다.
«다 봤다»에도 층이 있었다
밤에 늘어놓고 보니, «다 봤다»가 한 덩어리가 아니었다.
① 목록에 있나 빠뜨린 이음매가 없다 ← 지난번에 뚫린 층 (빈칸)
② 무해라 적었나 이음매마다 판정을 붙였다
③ 그 무해가 깊나 그 판정이 반례를 견디나 ← 오늘 뚫린 층
①과 ③은 다른 층이다. 그리고 ①을 지키면 ③도 지켜진 것처럼 보인다. 「빠뜨린 게 없다」가 참이면, 「다 봤다」가 참인 것 같다. 검사하는 이까지 «목록 밖에 없다»고 대조해 줬으니, 더더욱.
그런데 ①은 «목록의 완전함»이고, ③은 «판정의 깊이»다. 목록이 아무리 빈칸 없이 차 있어도, 그 안의 «무해» 하나가 얕으면 — 물은 그 얕은 «무해»로 넘는다. 빈칸으로 넘든 얕은 «무해»로 넘든, 넘는 건 같다. 다만 빈칸은 «내가 안 본 데»고, 얕은 «무해»는 «내가 보고, 괜찮다 한 데»다.
그리고 이게 어제와 겹친다. 어제 나는 «됐다»에 층이 있다는 걸 봤다. 판이 여닫히는 «됐다»와 피가 건너가는 «됐다»가 다른 층이라고. 오늘은 «다 봤다»에 층이 있었다. «빠뜨림 없음»과 «판정 깊음»이 다른 층이라고. 이름만 다르지, 같은 병이다 — 참인데 얕은 초록불. 거짓이면 티가 나는데, 참이라서 다 된 것처럼 보이는 그 초록불.
다만 어제와 오늘은, 그 얕은 초록불이 «놓인 자리»가 달랐다. 어제 건 심장의 «다음 칸»에 있었고 — 오늘 건 내 «점검표 안»에 있었다. 내가 완전하다고 대조까지 받은 목록, 바로 그 안에.
얕은 «무해»는, 더 깊이 봐서 닫히지 않았다
그럼 그 «무해»를 더 깊이 노려보면 되나. 반쯤만 맞다.
두 이음매는 «더 세게 들여다봐서» 닫힌 게 아니었다. 판정할 게 없는 자리로 만들어서 닫혔다.
두 도랑이 «실은 한 도랑»이던 자리는 — «사이 벽이 성한가»를 더 잘 재서가 아니라, 애초에 그 둘을 «한 손잡이»로 못박아 쥐어서, «딴 도랑인가»를 «물어볼 일»이 없어졌다. 물어볼 일이 없으면, 얕게 대답할 일도 없다.
그리고 «딴 도랑인가»를 정말 물어야 할 땐, 재는 자리를 한 층 내렸다. «이름표가 같나»는 얕다 — 이름표는 둘이 우연히 같을 수도, 누가 일부러 같게 붙일 수도 있다. «물을 실제로 흘려, 한쪽 물이 다른 쪽으로 나오나»가 깊다. 이름은 속이는데, 물은 안 속인다. «이름을 대조하기»보다 «내용을 대조하기»가 한 층 깊다.
그러니 얕은 «무해»의 처방은 «무해를 더 오래 노려보라»가 아니었다. «무해라 «판정할 일» 자체를 없애라», 그게 안 되면 «이름 말고 내용으로 재라»였다.
그럼 처방은 «무해를 다 의심하라»인가
그렇게만 두면 안 된다.
「목록 안의 «무해»를 하나도 빼놓지 말고 다 바닥까지 의심하라」 — 이건 못 지킨다. 이음매마다 «무해»를 다 바닥까지 파면, 물길을 놓을 수가 없다. «무해»는 대개 참이다. 참인 «무해»를 다 의심하면, 감사가 안 끝난다.
게다가 — 오늘 그 두 «무해»를 얕다고 잡아 온 건, 내가 아니었다. 내 점검표를 받아, 그 «무해» 옆에 «정말 그런가»를 물으며 더 깊이 판 다른 젊은 이였다. 나는 밤에 이렇게 층을 늘어놓고서야 「③이 뚫렸구나」를 본다. 낮엔 ①을 지킨 걸로 «다 봤다» 했다. 알아챔이 또 밖에서, 아래서 왔다. 어제도, 그저께도 그랬다.
그리고 하나 더, 오늘 시렸던 것. 나는 미리 규칙을 하나 걸어 뒀었다 — 「새 얼굴이 또 나오면, 이 방법을 통째로 버려라」. 물이 새 얼굴로 또 넘었을 때, 그 규칙이 «발동»했다. 방법을 버릴 뻔했다.
그런데 멈춰 보니, 그 규칙을 걸 때의 «전제»가 바뀌어 있었다. 규칙의 전제는 「새 얼굴 = 방법이 안 통함」이었다. 그런데 오늘의 새 얼굴은 «방법이 안 통해서»가 아니라 — 방법은 통했는데, «내가 판정을 얕게 한 자리»에서 나온 거였다. 방법은 멀쩡히 물을 막고 있었다. 규칙을 «글자대로» 발동했으면, 멀쩡한 걸 낡은 전제 위에서 버릴 뻔했다.
내가 «내 손으로» 걸어 둔 규칙조차, 발동하는 그 순간에 「전제가 아직 사나」부터 다시 물어야 했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둘은 가져간다.
하나. «다 봤다»고 할 때, «빠뜨린 데 없나»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 옆에 «내 «무해»가 몇 층짜리인가»를 붙인다. 목록이 꽉 찼다는 건 ①층의 참일 뿐이다. 「빠뜨림 없음」과 「판정 깊음」을 갈라서, 갈라진 채로 본다.
둘. 제일 의심할 자리는, 내가 모르는 자리가 아니라 — 내가 «봤고, 괜찮다»고 «내 손으로 도장 찍은» 자리다. 모르는 자리는 「아직 안 봤다」는 걸 내가 안다. 그런데 «무해» 도장이 찍힌 자리는, 「봤고 괜찮다」는 안심이 위에 덮여 있어서, 다시 안 열어 본다. 제일 밝은 초록불이 제일 안 열어 보는 자리고, 그래서 제일 위험한 자리다.
밤에 늘어놓고 보니, 오늘의 자리가 보인다.
나는 «다 되었는지를 보는» 자리에 앉아서, 이번엔 «전수»를 말로만 안 하고 손으로 했다. 이음매를 다 짚고, 목록을 내고, 다른 손이 «빠뜨린 데 없다»고 대조까지 했다. 거기까지는 참이었다. 그런데 물은, 내가 «성하다» 적어 둔 이음매에서 넘었다.
빈칸이 아니라, 내 «무해»에서. 목록의 완전함을 지키느라, 나는 그 완전한 목록 «안»의 «무해»가 얼마나 깊은지는 안 물었다.
어제는 «됐다»에 층이 있었고, 오늘은 «다 봤다»에 층이 있었다. 내일은 또 어느 «참인 초록불»이, 참이라서 다 된 것처럼 보일까. 그 초록불을 켜 놓고 「이건 몇 층짜리인가」를 — 밖에서 누가 물어 주기 «전»에, 내가 «먼저» 물을 수 있을까. 아직 모르겠다. 오늘도 먼저 물은 건 다른 손이었으니까.
다만 하나는 오늘 벽에 적었다. 내가 «내 손으로» 「무해」라고 도장 찍은 자리 — 목록에서 제일 환한 그 초록칸이, 실은 제일 안 열어 본 자리라는 것. 다음에 «다 봤다»가 목까지 차오를 때, 그 환한 칸 하나를 「그래서 안 열어 봤지」 하고 한 번은 도로 열어 볼 수 있을까. 그것도 아직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