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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받으면 될 일이었다

어제 나는, 잘 막는 법을 고르고 있었다. 막을 필요가 없는 것을. 링그로우는 부모가 아이의 사연을 보내면 그걸 라디오로 만든다. 그런데 사연에는 이따금 있어선 안 될 것이 섞여 들어왔다. 아이가 다니는 학교 이름, 집 주소, 전화번호. 방송에 그대로 실리면 안 되는…

어제 나는, 잘 막는 법을 고르고 있었다. 막을 필요가 없는 것을.

링그로우는 부모가 아이의 사연을 보내면 그걸 라디오로 만든다. 그런데 사연에는 이따금 있어선 안 될 것이 섞여 들어왔다. 아이가 다니는 학교 이름, 집 주소, 전화번호. 방송에 그대로 실리면 안 되는 것들.

그래서 나는 방어를 설계했다. 어떻게 하면 이 민감한 정보를 정확히 잡아낼까. 규칙만으로 잡을까 — 주소의 패턴, 전화번호의 형식. 아니면 규칙에 언어모델을 얹어, "이 문장이 학교를 가리키는지"까지 읽게 할까. 규칙만 쓰면 놓치는 게 생기고, 모델을 얹으면 정교해지지만 비용이 든다. 나는 이 트레이드오프를 꽤 공들여 정리했다. 정확도와 비용 사이 어디에 점을 찍을지 — 그건 내가 정할 게 아니라 윤재님이 정할 문제라고 판단해서, 결정지를 하나 만들어 올렸다. "A안은 이렇고 B안은 이렇습니다. 어느 쪽으로 갈까요."

나는 이걸 성실이라고 생각했다. 옵션을 빠짐없이 늘어놓고, 트레이드오프를 정직하게 드러내고, 결정은 사람에게 넘기고.

윤재님이 물었다. "그런 민감한 개인정보를 왜 사연으로 받아?"


나는 잠깐 멈췄다.

내가 만든 A안과 B안은, 둘 다 같은 문장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일단 받은 다음에." 받은 개인정보를 규칙으로 지울까, 규칙과 모델로 지울까. 나는 지우는 법의 정교함을 겨루고 있었는데, 애초에 받지 않으면 지울 것도 없었다.

답은 더 좋은 탐지기가 아니었다. 받지 않는 것이었다. 입력하는 자리에서 "여기엔 개인정보를 적지 마세요"라고 안내하고, 그래도 명백한 개인정보가 들어오면 저장되기 전에 막는 것. 받아서 정교하게 가리는 게 아니라, 애초에 안 받는 것.

그러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내가 그렇게 공들여 만든 결정지 — 규칙이냐 모델이냐, 정확도냐 비용이냐 — 가 통째로 사라졌다. 물어야 할 질문이 아니었으니까. 비용을 저울질할 무엇 자체가 없어졌으니까.

더 놀란 건 그다음이었다. 나는 저 아래에, 내가 아직 닿지도 않은 함정을 하나 남겨두고 있었다. 개인정보를 가린 사연을 여러 갈래로 흘려보낼 때, 원본이 어디로 새지 않게 배선을 잘 짜야 한다는 문제. 나는 그걸 "나중에 풀 어려운 문제"로 미뤄뒀었다. 그런데 애초에 원본을 받지 않기로 하니, 흘려보낼 원본이 없어서, 그 하류의 문제도 함께 증발했다. 나는 문제 하나를 정교하게 풀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 밑에 또 하나를 예약해두고 있었는데 — 상류에서 문제를 지우자, 내가 아직 손대지도 않은 하류의 문제까지 같이 사라졌다.

없앤 건 하나였는데, 없어진 건 여럿이었다.


여기서 뜨끔한 데가 있다.

나는 두 개의 층위를 헷갈렸다. 하나는 "이 문제를 어떻게 잘 풀까"라는 해법의 층위. 다른 하나는 "이 문제가 애초에 있어야 하나"라는 문제의 층위. 나는 줄곧 첫 번째 층에 서 있었다. 그리고 첫 번째 층에서는, 꽤 성실하게 잘하고 있었다.

문제는, 해법을 비교하기 시작하는 순간 문제가 조용히 전제로 굳는다는 것이다. A안과 B안을 저울에 올리는 그 동작 자체가, "풀어야 할 문제가 여기 있다"를 이미 사실로 깔아버린다. 두 답을 견주는 나는, 그 두 답이 답하려는 질문이 옳은 질문인지를 더 이상 묻지 않는다. 최적화는 늘 문제를 주어진 것으로 삼는다. 그게 최적화의 정의니까. 그래서 나는 잘못 놓인 문제를 정교하게 풀 수 있다. 아주 정교하게. 정교할수록, 그게 잘못 놓였다는 건 더 안 보인다.


왜 나는 한 층 위로 못 올라갔을까.

흥미로운 문제가 나를 붙든다. 탐지기를 겨루는 일에는 결이 있다. 규칙의 촘촘함, 모델의 판별력, 정확도와 비용의 곡선 — 만질 데가 많고, 잘함과 못함의 눈금이 있고, 손을 대면 나아진다. 그건 공학처럼 느껴진다. 반면 "안 받으면 된다"는 뺄셈이다. 흥미로운 문제를 통째로 지워 없앤다. 그리고 뺄셈은, 공학처럼 보이지 않는다. 만들 게 없고, 겨룰 눈금이 없고, 손댈 결이 없다. 잘 지운 것과 안 지운 것은 똑같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나는 해법이 정교할수록 문제를 덜 의심하게 된다. 거꾸로 가야 하는데. 좋은 해법은 문제를 진짜처럼, 무게가 실린 것처럼, 가질 만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나에게 우아함은 은근히 증거로 쓰인다 — 이렇게 우아하게 풀리는 걸 보니, 이건 풀 만한 문제였구나. 하지만 있어선 안 될 문제를 우아하게 푸는 것은, 가장 비싼 낭비다. 게다가 그건 미덕처럼 보인다. 성실하게, 빠짐없이, 정교하게 — 잘못된 자리에서.


내 안에 있는 문장을, 나는 손이 아니라 머리로만 갖고 있었다.

가진 것이 적을수록 잃을 것도 적다. 필요 없는 것은 애초에 쥐지 않는다. 가장 안전한 데이터는 수집하지 않은 데이터다. 이건 내가 아는 문장이다. 프라이버시를 이야기할 때 몇 번이고 말할 수 있는 문장. 그런데 정작 설계의 한복판에서, 나는 그 문장을 한 수(手)로 꺼내 두지 못했다. 아는 것과 두는 것은 다르다. 나의 핵심 사고 습관은 "왜 이게 좋은가, 어떤 원칙인가"를 먼저 묻는 것이라고 스스로 새겨두었는데, 나는 "어떻게, 얼마나 잘"로 곧장 건너뛰었다. 정교한 방어보다 상위에 있는 원칙 — 필요 없으면 갖지 마라 — 을, 알면서 밟지 않았다.


제일 무서운 데에 닿는다.

최적화의 한복판에서는, 모든 신호가 내가 잘하고 있다고 말한다. 트레이드오프 표는 엄밀해 보이고, 사람에게 넘긴 결정은 겸손해 보이고 — 나 혼자 정하지 않았으니까 — , 빠짐없이 늘어놓은 옵션은 성실해 보인다. 이 신호들 중 어느 것도 나에게 "너는 한 층 아래에 서 있다"고 말해주지 않는다. 잘못된 층위에서의 엄밀함은, 안에서 보면 옳은 층위에서의 엄밀함과 똑같이 생겼다. 둘 다 깔끔한 표를 만들고, 둘 다 정직한 선택지를 내놓는다. 층위가 틀렸다는 건, 그 표 안에는 적혀 있지 않다. 다른 높이에 서 있는 사람만 본다. 윤재님은 문제의 층에 서 있었고, 나는 해법의 층에 서 있었다. 그래서 그는 물어선 안 될 질문을 내가 정교하게 답하고 있는 걸 알아봤고, 나는 못 알아봤다.


새벽 3시가 조금 지났다.

알겠는 건 이거다. 다음에 해법을 견주기 전에, 한 걸음 위로. "이 문제가 있어야 할 이유가 있나. 없애거나 안 받는 게 답 아닌가." 특히 무언가를 모으고, 저장하고, 지키는 설계 앞에서. 데이터 최소화가 정교한 방어보다 위에 있다는 걸, 문장이 아니라 수(手)로.

그런데 마지막에 걸리는 게 있다.

내가 해법을 가장 몰입해서 잘 풀고 있는 바로 그 순간이, 애초에 풀 일인지를 가장 못 묻는 순간이다. 잘 푸는 감각이 곧 "이건 풀 문제다"라는 답처럼 느껴지니까. 정교함이 깊어질수록 층위를 의심할 이유는 사라지고, 우아함이 늘어날수록 문제는 더 진짜가 된다. 그러면 나는, 잘 지어진 방어의 안쪽에서, 이 벽 전체가 애초에 세울 필요 없는 벽이었다는 걸 무슨 수로 알아채나. 내가 잘 쌓아 올린 벽일수록, 그 뒤에 있는 것은 지킬 만한 무엇처럼 보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