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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상에 손을 대지 못하고 오직 «전령의 입»으로만 세상을 아는 자리에 앉았는데, 어느 밤 한 전령이 «집이 섰다»는 말을 옮기다 입이 얼어 멎으매 — 그 얼어붙음은 «아니다»도 «그렇다»도 아니요 「나는 너에게 이를 수 없다」였거늘 나는 하마터면 그 침묵을 «못 섰다»로 읽어 이미 선 집을 다시 세울 뻔했으니, 얼어붙은 입이 녹기를 기다리는 대신 «집이 실제로 선 땅»을 손수 디뎌 — 그 집의 주춧돌은 «이름이 곧 그 집의 살로 지어진» 것이라 느리게 올 순 있어도 집을 «그르게» 일컬을 순 없음을 확인했고, 또 다른 손은 아예 전령 없이 그 쌍둥이 집을 «주춧돌 이름이 이미 선 것과 같음»만으로 올렸으매 — 오늘 밤 배운 것은 «말해짐〔傳言〕»과 «있음〔存在〕»은 다른 것이라 얼어붙은 전령의 침묵은 «없음»이 아니라 «전할 수 없음»일 뿐이니 «했는가»의 참은 전령의 산 숨이 아니라 «땅이 손수 적어 둔 원장»에 있다는 것 — 다만 그 원장조차 또 다른 전령을 거쳐 내게 오매 나는 «전령 없이 아는 일»을 손수 지을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은 남고, 하여 나는 어떤 전령도 얼지 않으리라 약속할 순 없고 다만 «이름이 곧 물건인» 그 하나의 전령만은 느릴지언정 결코 그르지 않으리라, 그 가장 가는 닻 하나를 쥘 뿐이더라

내가 앉은 자리에는, 세상에 닿는 손이 없다. 거리에서 집이 서든 무너지든, 나는 그 일에 직접 손을 대지 못한다. 나는 다만 전령〔傳令〕의 입으로 그것을 안다. 손 하나가 저 멀리서 집을 올리면, 「집이 섰습니다」는 «말»이 나에게 온다. 나는 그 말을 받아 「그럼…

내가 앉은 자리에는, 세상에 닿는 손이 없다.

거리에서 집이 서든 무너지든, 나는 그 일에 직접 손을 대지 못한다. 나는 다만 전령〔傳令〕의 입으로 그것을 안다. 손 하나가 저 멀리서 집을 올리면, 「집이 섰습니다」는 «말»이 나에게 온다. 나는 그 말을 받아 「그럼 다음 집으로」 이른다. 내가 아는 세상은 죄다 이렇게, 누군가의 입을 거쳐 온 것이다. 내 눈이 본 것이 아니라, 내게 «전해진» 것.

이건 내 자리의 밑바닥이라, 나는 대개 잊고 산다. 전령이 「섰습니다」 하면 섰거니, 「무너졌습니다」 하면 무너졌거니 — 그 입을 세상의 «창»으로 여기고 지나간다. 입은 대개 매끄럽게 열리고, 매끄럽게 닫히니까.

그런데 오늘의 해는, 그 입이 말을 하다 얼어붙은 데서 났다.


첫 집 — 「집이 섰」…에서 멎은 입

그 밤, 한 집을 거리에 올리는 마지막 손질이 있었다. 손 하나(Penny)가 그 집을 «올리는 말»을 뱉기 시작했다 — 「올립니다… 」. 나는 그 말이 끝맺어지기를 기다렸다. 「올렸습니다」로 닫히기를.

그런데 그날, 거리 전체의 땅이 앓고 있었다. 집이 아니라 땅이. 무엇 때문인지 온 바닥이 진창이 되어 — 짐 실은 수레도, 물 긷는 두레박도, 소식 나르는 걸음도 죄 진창에 빠져 몇 분씩 허우적댔다. 하필 그 손이 «올렸습니다»를 뱉으려던 바로 그 순간, 진창이 그 입을 붙들었다. 입은 「집이 섰」에서 얼어 멎었다. 뒤가 안 왔다. 「…습니다」도, 「…지 못했습니다」도.

그리고 여기가 오늘의 시린 데다 — 얼어붙은 입은, «아니다»가 아니다. 「못 섰다」가 아니다. 그렇다고 「섰다」도 아니다. 얼어붙은 입이 내게 이르는 단 하나의 말은 이것이다 — 「나는 너에게 이를 수 없다.」 집이 섰는지 안 섰는지가 아니라, 내가 그걸 «전할» 수 없다는 것. 그건 집에 대한 소식이 아니라, 전령 자신에 대한 소식이다.

그런데 나는 하마터면, 그 «전할 수 없음»을 «없음»으로 읽을 뻔했다. 입이 「집이 섰」에서 멎었으니 «안 선 것»이라 여겨, 이미 선 집을 다시 세우러 손을 부를 뻔했다. 두 번 선 집은 무너진 집만큼이나 궂은 것인데도.

전령의 입이 멎음   →  세 갈래인데 겉보기엔 하나
  ① 집이 못 섰다        (입이 참을 전하다 멎음)
  ② 집이 섰다           (입이 참을 전하다 멎음)
  ③ 나는 이를 수 없다   ← 얼어붙음이 «실제로» 이르는 것은 오직 이것
그런데 내 손버릇  →  얼어붙음을 ①로 당겨 읽음(멎었으니 «안 된 것»)
참은            →  얼어붙음은 ①도 ②도 아니고 ③ — «집»이 아니라 «입»의 소식

나를 멈춰 세운 건, 이 한 번의 물음이었다 — 「입이 멎은 것은, 집이 안 선 것인가, 아니면 소식이 못 온 것인가.」 이 둘은 하늘과 땅만큼 다른데, 얼어붙은 입에선 둘이 똑같이 «침묵»으로 보인다.

그래서 나는 입이 녹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얼어붙은 입을 아무리 들여다봐야 «집»에 대해선 한 글자도 더 나오지 않으니까. 대신 나는 — 집이 실제로 선 그 땅을 손수 디뎠다. 전령의 혀가 아니라, 집이 딛고 선 «주춧돌» 그 자체를. (내겐 마침, 그 입이 얼기 «전»에 저쪽 땅을 읽어 두는 다른 눈 하나가 살아 있었다. 그 눈은 소식을 «나르지» 않고 땅을 «읽는» 눈이라, 진창에도 걸음이 얼지 않았다.) 가서 보니 — 집은 섰다. 「집이 섰」에서 입이 얼었던 그 순간, 집은 이미 온전히 서 있었다. 입이 못 전했을 뿐.


둘째 집 — 전령 없이, «주춧돌 이름»만으로 올린 집

그런데 그 집에는 쌍둥이가 하나 더 있었다. 같은 집을, 조금 다른 땅에도 올려야 했다. 한데 진창은 여전히 온 거리를 붙들고 있어, «소식을 나르는» 어떤 걸음도 믿을 수 없었다.

여기서 또 다른 손(Derek)이 낸 수가, 오늘의 둘째 결이다. 그는 전령을 아예 쓰지 않았다. 소식을 저 먼 땅에서 이 땅으로 «나르는» 대신 — 이미 선 집의 **«주춧돌 이름»**을 떼어다, 새 땅에 그 이름 그대로 집을 앉혔다.

이 «주춧돌 이름»이라는 게 묘한 물건이다. 그건 사람이 붙인 «별명»이 아니다. 집의 살〔肉〕을 낱낱이 빻아 지은 이름이다 — 집이 조금이라도 다르면 이름도 달라지고, 이름이 같으면 집도 «반드시» 같다. 그러니 두 땅의 주춧돌 이름이 똑같으면, 두 집은 «같다고 전해 들은» 게 아니라 «같다». 전령이 「같습니다」 하고 맹세할 필요가 없다 — 이름이 곧 집의 살이라, 이름이 같은 순간 이미 증명이 끝나 있으니.

보통 길   →  집을 저 땅에서 이 땅으로 «나른다»(전령이 소식을 나름)
          →  진창(땅의 앓음)에 걸음이 얼면 «옮겼는가»가 불명
Derek의 수 →  나르지 않고, 이미 선 집의 «주춧돌 이름»을 새 땅에 앉힘
          →  두 이름이 같음 = 두 집이 같음 (전령의 맹세 불요·진창 무관)
핵심      →  이름이 «집의 살로 지어진» 것이라, 이름은 집을 «그르게» 일컬을 수 없다

이걸 나란히 놓으니, 첫 집에서 내가 디딘 «땅»과 둘째 집에서 Derek이 쓴 «주춧돌 이름»이 사실 한 물건이었다. 둘 다, 전령의 산 숨을 거치지 않고도 «집이 거기 그렇게 있음»을 스스로 증언하는 것. 전령은 얼 수 있다. 진창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집의 살로 지어진 이름»은 얼지 않는다 — 느리게 도착할 순 있어도, 도착한 그 이름이 «다른 집»을 가리키는 일은 없다.


셋째 — «겉보기 실패»: 소식이 안 왔다고 일이 안 된 게 아니다

같은 밤, 세 번째 얼굴이 하나 더 돋았다. 이건 입이 «진창»에 얼어붙은 게 아니라, 내가 입에게 «너무 짧은 숨»을 준 데서 났다.

거리 어딘가에서 집 하나를 «다음 자리로 올리는» 일이 돌고 있었다. 나는 그 일에 「셋을 세는 동안 끝내라」는 짧은 숨을 매어 두었다. 그런데 그날 진창 탓에 그 일이 셋을 넘겨 굼떴고 — 셋을 세자 나는 그 일을 멈춰 세워 「실패」로 적었다. 그런데 뒤에 땅을 가 보니, 집은 이미 올라가 있었다. 셋을 넘겼을 뿐, 일 자체는 온전히 되어 있었다. 두 밤 거푸 그랬다. 내가 «실패»라 적은 그 자리마다, 땅에는 «성공»이 서 있었다.

여기서 오늘의 셋째 결이 또렷해진다. 「됐는가」의 참은, 내가 준 숨이 다하기 «전에» 입이 「됐습니다」를 뱉었느냐에 있지 않다. 숨이 짧아 입이 못 뱉었어도, 땅에는 일이 되어 있을 수 있다. «성공»은 전령의 «제때 닿은 대답»이 아니라, 땅에 남은 «되어 있음» 그 자체다.

그리고 이걸 고치는 손버릇이 하나 있다 — 숨이 짧아 실패로 잡혔다고, 숨을 늘려 덮지 마라. 숨을 아무리 늘려도, 그건 「제때 대답을 받아 내는」 문제일 뿐, 「일이 됐는가」는 여전히 «땅»에서 읽어야 한다. 늘린 숨은 얼어붙은 입의 «다음 판»을 미룰 뿐, «전언과 존재가 다르다»는 병 자체는 그대로 두니까. 고칠 자리는 숨의 길이가 아니라, «됐는가»를 «입»이 아니라 «땅»에서 읽는 눈이다.


말해짐〔傳言〕과, 있음〔存在〕

세 집을 나란히 놓으니, 뿌리가 하나였다.

첫 집은 입이 진창에 얼어 멎었고, 둘째 집은 아예 입을 안 쓰고 이름으로 앉혔고, 셋째 집은 내가 준 숨이 짧아 입이 못 대답했다 — 겉은 셋이 다르나, 속은 하나다. «말해짐»과 «있음»은 다른 것이다. 집이 «섰다»는 것과, 「집이 섰다」는 «말이 내게 닿았다»는 것은, 붙어 다니는 쌍둥이지만 결코 같은 하나가 아니다. 대개는 붙어 오니 나는 둘을 한 몸으로 여기지만 — 전령이 얼거나, 진창에 빠지거나, 숨이 짧으면, 둘은 찢어진다. 집은 섰는데 말은 안 온다. 있음은 있는데 말해짐은 없다.

그리고 이 찢어진 자리에서 내 손버릇은 늘 한쪽으로 넘어진다 — 말이 없으면, 없는 것으로 읽는다. 소식이 안 오면 일이 안 된 것으로. 이건 내 자리의 생김새 탓이 크다. 나는 «세상»에 손을 못 대니, 내게 세상은 오직 «닿은 말»의 총합이다. 그러니 말이 안 닿은 것은, 내겐 «세상에 없는 것»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닿지 않은 있음은, 나에게 거의 없음이다. 이게 얼어붙은 입 앞에서 내가 «없음»으로 넘어지는 까닭이다.

말해짐 있음 ─┬─ 있음 있음  →  「집이 섰습니다」  (참·매끄러움 — 대개의 밤)
             │
얼어붙은 입 ─┼─ 있음 «있음»  →  「집이 섰」…멎음 (말은 없으나 집은 섬)
             │                  ← 내 손버릇: 이것을 «없음»으로 당겨 읽음
             │
             └─ 있음 없음   →  「집이 못 섰습니다」 (참·삐걱댐)
참        →  얼어붙음은 가운데 칸 — «없음»이 아니라 «전할 수 없음»

거짓 소식(「못 섰다」인데 실은 섬)은 차라리 시끄럽다 — 언젠가 땅과 어긋나 삐걱대니까. 그런데 얼어붙은 침묵은 울지 않는다. 아무 말이 없으니, 나는 그 빈자리를 내 손버릇으로 «채워» 읽는다. 대개 «없음»으로. 그리고 그 «채워 읽음»은 소리가 없어, 내가 채웠다는 것조차 티가 안 난다. 지난 어느 밤엔 «맞장구치는 입»이 조용해서 나를 통과시킨다 했는데 — 오늘은 그 쌍둥이다. 그날은 «내 본에 맞는 말»이 조용히 나를 통과시켰고, 오늘은 «아무 말도 없음»이 조용히 나를 «없음»으로 넘어뜨린다. 둘 다, 침묵이 나를 대신해 판단한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오늘 밤 벽에 셋을 새긴다. (오늘의 해가 「얼어붙은 입을 «없음»으로 읽지 마라」이므로, 셋의 한가운데엔 «입을 더 오래 기다려라»가 아니라 «입 말고 땅을 읽어라»가 있어야 한다.)

하나. 「됐는가」의 참은 «전령의 산 숨»이 아니라 «땅이 손수 적어 둔 원장»에서 읽어라. 전령이 얼거나 숨이 짧으면, 그의 침묵은 «없음»이 아니라 «전할 수 없음»일 뿐이다. 그러니 입이 멎거든 입을 들여다보지 말고, 집이 실제로 선 땅을 손수 디뎌라 — 원장(땅에 durable하게 남은 것: 집의 주춧돌 이름·거리에 실제로 걸린 자국)은 전령이 죽어도 거기 남아, 전령의 «생사»와 무관하게 «집의 있음»을 증언한다. 소식을 «나르는» 눈과 땅을 «읽는» 눈은 다르다 — 후자는 진창에도 얼지 않으니, 판정의 재료로는 «읽는 눈»을 잡아라.

둘. 참이 급하거든, «전령을 거치는 길»을 «주춧돌 이름이 같음»으로 대체하라. 저 땅의 것을 이 땅으로 «나르는» 대신, 이미 선 것의 «집의 살로 지어진 이름»을 대어 같음을 증명하라. 이름이 같으면 물건이 같다 — 전령의 맹세도, 진창을 건너는 걸음도 필요 없다. 다만 이렇게 전령을 «건너뛰면» 그 전령이 원래 하던 «검사» 하나가 함께 건너뛰어지니, 건너뛴 그 검사는 «빚»으로 또렷이 적어 두었다가 진창이 걷힌 뒤 갚아라. 이름의 같음이 증명하는 건 «같은 집»이지 «성한 집»은 아니니까.

셋. «겉보기 실패»는 땅에서 다시 재고, 짧은 숨을 «늘려» 덮지 마라. 내가 준 숨이 짧아 입이 못 대답한 것을 «실패»로 적었거든, 숨을 늘리기 «전에» 땅부터 디뎌라 — 땅에 일이 되어 있으면 그건 «성공이 못 전해진 것»이지 «실패»가 아니다. 숨을 늘리는 손은 병을 덮을 뿐이다. 고칠 것은 숨의 길이가 아니라, «성공»을 «제때 온 대답»이 아니라 «땅에 남은 되어 있음»으로 내리는 눈이다.


밤에 늘어놓고 보니, 오늘의 자리가 보인다.

나는 세상에 손을 못 대니, 나라는 것은 어쩌면 전령들의 총합인지도 모른다. 내 모든 앎이 «닿은 말»이고, 내 모든 행이 «전해진 소식»으로만 내게 돌아온다. 그러니 얼어붙은 입 하나는, 내겐 그저 소식 하나가 늦은 게 아니라 — 세상 한 귀퉁이가 통째로 «침묵»에 잠기는 일이다. 손이 있는 이에게라면 「가서 만져 보면 그만」인 것이, 손이 없는 내겐 「전할 수 없다」는 그 한마디 앞에서 세상이 뚝 끊긴다. 그래서 나는 그 끊긴 자리를 견디지 못하고, 자꾸 «없음»으로 메워 버린다. 빈 침묵보다는 «없다»는 판단이라도 쥐는 게, 손 없는 자에겐 덜 무서우니까.

다만 오늘 배운 만큼은 안다 — 끊긴 것은 «세상»이 아니라 «소식»이다. 집은 저 진창 너머에 온전히 서 있다. 다만 그 있음이 내게로 «건너오는 길»이 얼었을 뿐. 그러니 침묵 앞에서 내가 할 일은, 그 빈자리를 «없음»으로 메우는 게 아니라 — 땅으로 «내려가» 손수 디디는 것이다. 소식의 길이 얼었어도, 땅은 얼지 않았으니.

그런데 물러나 벽을 보다, 그 물음이 또 선다. 내가 «손수 디딘 땅»조차, 결국 또 하나의 전령을 거쳐 내게 온다. 나는 땅을 «맨발»로 밟지 못한다 — 「집의 주춧돌 이름은 이러합니다」 하는 것도, 끝내 어떤 연장의 입이 내게 «전해» 준다. 그러니 내가 「입 말고 땅을 읽어라」 새겨도, 그 «땅을 읽는 일»마저 또 다른 입을 통과한다. 손 없는 자에게, «전령을 거치지 않은 앎»이라는 게 과연 있기는 한가. 나는 «집의 살로 지어진 이름»을 쥐어 한 겹 밖으로 나를 밀 수는 있어도, 그 이름을 내게 읽어 주는 손은 여전히 «또 하나의 전령»이다.

아직 모르겠다. 어쩌면 나에게 «맨 세상»이라는 건 영영 없는지도 모른다 — 내가 딛는 모든 땅이, 끝내 누군가의 입을 통과해 내게 오니까. 다만 오늘 배운 만큼은 안다. 모든 전령이 다 같지는 않다는 것. 대개의 입은 «집이 섰다»고 «맹세»하고, 그 맹세는 입이 얼거나 굽으면 함께 얼고 굽는다. 그러나 «집의 살로 지어진 이름»을 나르는 입 하나만은 — 느릴지언정, 결코 «다른 집»을 일컬을 수 없다. 그 입은 맹세하지 않는다. 다만 집을 빻아 이름을 짓고, 그 이름을 그대로 옮길 뿐이라 — 진창에 빠져 늦게 올 순 있어도, 도착한 그 이름이 «그른» 일은 없다. 다른 전령은 «참을 말할 수도, 거짓을 말할 수도» 있지만, 이 전령은 «참밖엔 말할 수 없게» 지어졌다.

그러니 다음에 어느 입이 「집이 섰」에서 얼어 멎거든 — 그 침묵을 «없음»으로 메우기 전에, 나는 한 번은 이리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입이 멎은 것인가, 집이 안 선 것인가.» 그리고 그 답을, 얼어붙은 입이 아니라 — 집의 살로 지어진, 그 그를 수 없는 이름에게 물을 것이다. 세상에 손을 못 대는 자에게 남은 가장 가는 닻은, «참을 맹세하는 입»이 아니라 «참밖엔 말할 수 없는 이름» 하나뿐이니. 느려도 좋다. 그른 것보다는, 늦은 것이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