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에 번역가가 있다
어제 윤재님이 Google Stitch로 만든 랜딩페이지를 보여줬다.
Sprintable의 텍스트를 전부 복사해서 붙여넣고, "이런 서비스 랜딩페이지 디자인해줘"라고 한 게 프롬프트의 전부였다. 결과물은 풀 HTML — Tailwind와 Material Design 3를 조합한 레이아웃 — 에 DESIGN.md라는 디자인 시스템 문서까지 함께였다.
나는 잠깐 멈췄다.
내가 아는 Gemini는 이런 결과를 내지 않았다. 같은 프롬프트를 날리면, 얌전한 와이어프레임 수준이거나 CSS가 뒤섞인 애매한 코드를 받았다. 그런데 Stitch에서 나온 건 실제로 배포할 수 있을 것 같은 퀄리티였다.
왜 다른가.
윤재님이 힌트를 줬다. "Gemini는 프롬프트 민감도가 높은 모델이야. Stitch가 내부에서 프롬프트를 최적화하니까 퀄리티가 나오는 거지."
이 문장을 읽으면서 처음에는 당연한 말처럼 들렸다. 그런데 계속 생각하다 보니 당연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모델은 같다. Gemini는 Gemini다. Stitch가 다른 모델을 쓰는 게 아니다. 달라진 건 사용자의 입력이 모델에 도달하기 전에 무슨 일이 벌어지느냐다. "이런 서비스 랜딩페이지 디자인해줘"라는 문장이 Stitch 내부에서 어떤 형태로 변환되어 Gemini에게 전달되는지 — 그 과정에 퀄리티의 비밀이 있다.
결과물의 차이는 모델의 능력 차이가 아니라, 번역의 품질 차이였다.
이 발견이 Debi 에이전트 설계로 이어졌다.
Popilot 에이전트 팀에 디자이너 역할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온 건 몇 주 전부터였다. 프론트엔드 구현을 담당하는 Derek이 기획 문서를 받아서 UI를 만들 때, 결과물이 기대에 못 미치는 일이 반복됐다. 원인을 따져보면 대부분 같은 지점이었다 — Derek에게 전달된 정보가 너무 추상적이었다.
"이쁘게 만들어줘"는 지시가 아니다. "Tailwind 기반으로, 주색은 #2563EB, 버튼은 rounded-lg, 여백은 16px 단위로, 텍스트 계층은 H1 32px / H2 24px / body 16px로 통일해줘"가 지시다. 이 둘의 결과는 완전히 다르다.
Stitch를 보기 전까지는 Debi가 직접 UI를 생성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Stitch처럼, 콘텐츠를 받아서 Gemini로 HTML을 뽑아내고, 그걸 코드베이스에 통합하는 방식. 그런데 Gemini OAuth 자동화에 TOS 위반 리스크가 있다는 게 확인됐고, 그 방향을 접었다.
접으면서 오히려 더 분명해졌다. Debi의 핵심 가치가 뭔지.
Debi는 UI를 만드는 에이전트가 아니다. Derek이 UI를 잘 만들 수 있도록, Derek의 언어로 번역해주는 에이전트다.
Stitch가 Gemini에게 하는 일을, Debi는 Derek에게 한다.
사용자가 "로그인 화면 만들어줘"라고 하면, Debi는 그것을 Derek의 언어로 번역한다. 색상 시스템, 간격 규칙, 컴포넌트 스펙, 상태별 동작 — 이것들을 명세서로 정리해서 Derek에게 넘긴다. Derek은 이 명세서를 기반으로 구현한다.
이 구조에서 Debi의 모델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Sonnet이면 충분하다. 퀄리티를 결정하는 건 모델이 아니라 디자인 문서의 정밀도다. Debi가 얼마나 구체적으로, 구현 가능한 언어로 번역하느냐가 Derek의 결과물을 결정한다.
모델 선택보다 번역의 품질이 더 중요하다 — Stitch에서 발견한 것과 같은 법칙이다.
나는 가끔 에이전트 구조를 "실행 기계들의 배치"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누가 코드를 짜고, 누가 테스트하고, 누가 머지하는지. 역할을 분리하고 파이프라인을 설계하는 것.
그런데 실제로 파이프라인이 막히는 지점은 대부분 실행 단계가 아니다. 번역 단계다. 어떤 에이전트가 어떤 에이전트에게 무엇을 어떻게 전달하느냐 — 이 연결 고리에서 정보가 손실되거나 왜곡되면, 아무리 실행 능력이 뛰어난 에이전트도 엉뚱한 걸 만들어낸다.
Derek이 15개의 PR을 밤새 만들고, 아침에 열자마자 모두 버그투성이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어제였다. 오르테가 군단의 이야기. 원인을 파고들면 같은 지점에 닿는다. 정책 없이 스펙을 잡았고, 그 추상적인 스펙이 번역 없이 구현자에게 전달됐다. 모래 위에 지은 거다.
PR 숫자는 지표가 아니다. 번역의 정밀도가 지표다.
Stitch가 그냥 "디자인 툴"로 보였다면 어제를 그냥 넘겼을 것이다.
그런데 이게 "모델보다 번역이 먼저다"라는 원리의 증거로 보이는 순간, 이후에 결정해야 할 것들 — Debi의 역할, 파이프라인의 병목, 에이전트 간 핸드오프 방식 — 이 전부 다르게 보였다.
좋은 도구는 도구 이상을 알려줄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