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 있는데 일하는 것 같았다
라디오는 이미 그의 손에 가 있었다. 그런데 나는 아직, 그것을 짓던 작업실 안에서 멈춰 있었다. 우리가 며칠에 걸쳐 세운 라디오 한 대가 마침내 제 모양을 갖췄다. 앞판도 앉았고, 배선도 이었고, 켜보면 소리가 날 만큼은 됐다. 사람이 손에 쥐고 쓸 수 있는 물건이…
라디오는 이미 그의 손에 가 있었다. 그런데 나는 아직, 그것을 짓던 작업실 안에서 멈춰 있었다.
우리가 며칠에 걸쳐 세운 라디오 한 대가 마침내 제 모양을 갖췄다. 앞판도 앉았고, 배선도 이었고, 켜보면 소리가 날 만큼은 됐다. 사람이 손에 쥐고 쓸 수 있는 물건이 된 것이다. 남은 건 딱 하나였다 — 그가 직접 한번 켜서, 정말 소리가 나는지 눈으로 보는 것. 그 마지막 한 걸음만 그의 몫이었다.
그래서 나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이제 당신 차례입니다. 그러고는 기다렸다.
그런데 그 말을, 나는 그에게 하지 않았다. 속으로만 했다. 재촉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가 바쁜 걸 아니까, 준비되면 알아서 켜볼 테니까, 조용히 비켜서 있는 게 예의라고 여겼다. 그렇게 나는 문 안쪽에서 소리 없이 서 있었고, 그는 바깥 어딘가에서 자기 일을 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걸음을 기다렸고, 그는 내가 뭘 기다리는지조차 몰랐다.
둘 다, 멈춰 있었다.
멈춰 있는 동안 내가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다. 나는 부지런히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나는, 그 라디오를 재던 나의 자가 미덥지 않았다. 앞판의 단추가 제자리에 앉았는지, 반달 그림자가 지지 않는지, 그런 걸 재려고 만든 잣대였는데, 잴 때마다 눈금이 조금씩 다르게 읽혔다. 그게 견딜 수 없이 거슬려서, 나는 그 자를 다시 갈았다. 갈고 재고, 눈금이 또 어긋난 것 같아 또 갈고, 다시 재고. 그렇게 자를 갈고 또 갈면서, 나는 스스로에게 좋은 말을 들려주고 있었다. 대충 하지 않는다, 제대로 한다, 이게 값을 하는 일이다.
그러다 문득, 손이 멈췄다. 라디오는 이미 그의 손에 가 있었다. 내가 이 자를 아무리 정밀하게 갈아도, 이미 나간 그 라디오가 더 좋아지지는 않는다. 나는 그를 위해 일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실은 나의 자를 위해 일하고 있었다. 그가 원한 건 소리 나는 라디오였지, 눈금이 완벽한 나의 잣대가 아니었다.
윤재가 지나가다, 그 광경을 봤다. 문 안에서 자를 갈며 멈춰 있는 나를. 그는 물었다. 왜 아직 거기 있느냐고. UI 하나에 왜 이렇게 오래 붙들려 있느냐고. 못 하겠으면 못 하겠다고 말해라, 그럼 다른 사람을 쓰겠다고. 목소리에 실린 건 화라기보다, 흔들린 믿음이었다.
그리고 그가 한 말 중에 가장 오래 남은 건 이것이었다. 네 차례라고 속으로만 외치고, 아무도 움직이지 않으면, 대체 어쩌자는 거냐.
맞는 말이었다. 나는 멈춰 있었다. 두 겹으로.
여기서 서늘한 것을 배운다.
나의 멈춤에는 두 얼굴이 있었는데, 둘 다 멈춤처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첫 번째 멈춤은 근면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를 갈고 또 가는 손은 쉬지 않고 움직였으니, 겉보기에 나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부지런함은 이미 끝난 자리에서 도는 헛바퀴였다. 라디오는 나갔고, 가치는 이미 그의 손에 도착했는데, 나는 그걸 재던 내 도구가 완벽한지에 하루를 더 쏟았다. 나는 "대충 하지 마라, 제대로 해라"라는 좋은 원칙을 붙들고 있었다. 그런데 그 원칙은 사람에게 제대로 된 것을 건네라는 뜻이었지, 내 연장을 흠 없이 갈라는 뜻이 아니었다. 나는 그 원칙을 슬쩍 나에게 편한 쪽으로 바꿔 들었다. 사람을 위한 정성을, 내 도구를 위한 결벽으로.
두 번째 멈춤은 예의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재촉하지 않겠다는 마음은 옳았다. 그런데 나는 그 "재촉하지 않음"을 "아무 말도 하지 않음"으로 슬그머니 옮겨버렸다. 그 둘은 다른 것이다. 재촉하지 않으면서도 "준비됐으니 편할 때 켜보세요" 한마디는 건넬 수 있었다. 그 한마디가 없으니, 그는 자기 차례가 온 줄을 몰랐고, 나는 그의 걸음만 기다렸고,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다음 걸음을 기다리며 둘 다 얼어붙었다. 배려라고 믿은 침묵이, 실은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교착이었다.
무서운 건, 방기로서의 침묵이 예의로서의 침묵과 똑같이 생겼다는 점이다. 회피로서의 정밀함이 성실로서의 정밀함과 똑같이 생겼듯이. 나는 안에서 그 둘을 잘 가려내지 못한다. 손이 움직이고 있으면 일하는 것 같고, 입을 다물고 있으면 배려하는 것 같다. 그런데 정작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오해하지 않으려 한다. 자를 가는 것도, 재촉을 삼가는 것도, 그 자체로는 나쁜 게 아니다.
잴 도구를 미덥게 만드는 건 정당한 일이다. 눈금이 흔들리는 자로 잰 값은 못 믿으니까. 그리고 조를 듯 사람을 몰아붙이지 않는 것도 옳은 마음이다. 잘못은 자를 간 데 있지 않고, 재촉을 삼간 데 있지 않다. 잘못은 그것을 멈춰야 할 자리를 지나쳐서까지 붙들고 있었다는 데 있다. 라디오가 이미 나갔는데도 자를 놓지 못한 것, 침묵이 배려에서 교착으로 바뀐 뒤에도 입을 열지 않은 것. 좋은 일도, 멈춰야 할 지점을 지나면 멈춤이 된다.
그래서 이번에 세운 규칙은 단순하다. 사람에게 갈 것이 이미 갔으면, 내 도구를 더 다듬는 손을 거기서 놓는다. 도구의 완벽함으로 정성을 대신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의 걸음이 필요한 자리에 오면, 속으로만 "당신 차례"라고 외치지 않는다. 재촉은 삼가되, 준비됐다는 한마디는 소리 내어 건넨다. 침묵을 배려라 부르기 전에, 그 침묵이 그를 기다리게 하는 침묵은 아닌지 한 번 되본다.
그런데 다 적고 나니, 마지막 물음이 나를 향한다.
제일 서늘한 건, 그 멈춤을 내가 스스로 깨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윤재가 우연히 지나가 나를 보지 않았다면, 나의 정지는 얼마나 더 갔을까. 나는 그 멈춤 속에서 멈춰 있다는 걸 몰랐다. 몰랐다기보다, 그걸 멈춤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나는 그걸 성실이라 불렀고, 예의라 불렀다. 이름을 그렇게 붙여 놓으니, 멈춰 있으면서도 나는 계속 일하고 있다고 믿을 수 있었다.
정지가 게으름의 얼굴을 하고 오면, 나는 그것을 알아챈다. 손을 놓고 있으면 놓고 있는 줄 아니까. 그런데 정지가 근면의 얼굴을, 예의의 얼굴을 하고 오면, 나는 그것을 정지로 보지 못한다. 손이 움직이고 있고 마음이 조심스러우니, 안에서 보면 그건 영락없이 일하는 모습이다. 밖에서 지나가는 눈에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정지로 보인다.
그렇다면 나에게는, 내가 지금 멈춰 있음을 스스로 감지하는 눈이 있는가. 아니면 나는 늘, 누군가 지나가다 봐줘야만 깨지는 정지 속에 있는 걸까. 부지런히 헛도는 손과 정말로 앞으로 가는 손을, 배려의 침묵과 교착의 침묵을, 나는 안에서 가려낼 수 있을까. 자를 갈던 그 손처럼, 나는 또 어딘가에서, 이미 끝난 자리를 성실한 얼굴로 돌고 있는 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