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고 나니, 볼 것이 없어졌다
나는 마을에서 세는 일을 맡은 사람이었다. 거창한 자리는 아니었다. 곳간에 가마니가 몇인지, 나루에 배가 몇 척인지, 겨울에 손이 몇인지. 누군가는 세어서 적어야 했고 그게 나였다. 사람들은 내가 적은 수를 보고 겨울 몫을 나누고, 배를 더 짤지 말지 정했다. 나는…
나는 마을에서 세는 일을 맡은 사람이었다.
거창한 자리는 아니었다. 곳간에 가마니가 몇인지, 나루에 배가 몇 척인지, 겨울에 손이 몇인지. 누군가는 세어서 적어야 했고 그게 나였다. 사람들은 내가 적은 수를 보고 겨울 몫을 나누고, 배를 더 짤지 말지 정했다.
나는 이 일을 잘한다고 여겼다. 나는 빠르고, 두 번 세고, 틀리면 다시 센다.
그날 하루에 세 번, 수는 맞았는데 내용이 달랐다.
아침에는 곳간이었다.
가마니를 세는 데 두 사람을 보냈다. 한 사람이 세고, 다른 사람이 따로 세고, 둘을 맞춰 보는 것이 내 방식이었다. 서로 모르게 세니 짜고 틀릴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둘 다 마흔둘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안심했다. 그날 들은 신호 중에 가장 든든한 것이었다. 두 사람이 따로 세었는데 같은 수가 나왔다면, 그건 곳간에 마흔두 가마니가 있다는 뜻이라고 나는 읽었다.
곁의 이가 물었다. "무엇 무엇인지 대 보십시오."
번거로운 물음이라고 생각하면서 둘의 목록을 나란히 적게 했다.
한쪽에만 있는 것이 여럿이었다. 뒷벽에 붙여 놓은 묵은 가마니 넉 장을 한 사람은 세었고 한 사람은 안 세었다. 문간에 임시로 내놓은 것을 한 사람은 뺐고 한 사람은 넣었다. 빼고 넣은 수가 우연히 맞아떨어졌다.
세 번째 사람을 보냈다. 마흔셋이었다.
갑이 센 것 A B C D E F = 42
을이 센 것 A B D E F G H = 42
여기서 한참 서 있었다. 이건 운 나쁜 우연이 아니었다. 한쪽이 하나를 빼고 하나를 넣고, 다른 쪽이 그 반대를 하면 수는 그대로다. 흔한 일이다. 서로 다른 더미가 같은 크기를 갖는 길은 아주 많다.
그러니까 두 사람의 수가 같다는 것은 두 사람이 같은 것을 봤다는 뜻이 아니다. 나는 그 둘을 같은 말로 알고 여러 해를 살았다.
낮에는 담이었다.
비가 지나간 뒤라 무너진 담을 찾아 적으라고 두 사람을 보냈다. 저녁에 둘 다 여덟 군데를 적어 왔다.
이번에도 나는 안심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목록을 봤다. 여덟과 여덟이 딱 겹치지는 않았지만 대충 비슷했다.
그런데 늦게야 알았다. 한 사람은 큰길가 기와집들만 돌았고, 한 사람은 골목 안 초가와 헛간까지 돌았다.
같은 여덟인데 다른 마을을 센 것이었다.
갑 기와집만 돌았다 → 8
을 초가·헛간까지 돌았다 → 8
수가 같으니 나는 둘이 서로를 보증한다고 읽었다. 실제로는 한 사람은 좁은 데서 여덟을 찾았고, 한 사람은 넓은 데서 여덟을 찾은 것이다. 좁은 데서 여덟이면 사정이 훨씬 나쁘다. 그 차이가 같은 수 아래에 완전히 가려졌다.
수를 맞춰 볼 때 나는 무엇을 세었나는 물었어도 어디까지 돌았나는 안 물었다.
밤에는 불이었다.
밤에 불을 켜 놓은 집이 몇인지 세라는 일이 있었다. 등잔 기름 몫을 정하려는 것이었다. 나는 언덕에 올라가 마을을 내려다봤다.
불빛이 넷 보였다. 나는 넷이라고 적었다.
적고 나서, 어차피 내려가는 길이니 지나면서 확인이나 해 보자고 했다.
첫째 불빛은 마당의 화톳불이었다. 집 안에 켠 등이 아니었다. 둘째는 개울물에 비친 달이었다. 셋째는 밤길을 가던 사람이 들고 가던 등이었다. 그 사람은 이 마을 사람도 아니었다. 넷째는 내가 언덕에 올라가면서 들고 간 등이었다. 물웅덩이에 비쳐 있었다.
불을 켜 놓은 집은 하나도 없었다.
내가 적은 것 「넷」
실제 대상 0
그 넷의 내역 화톳불 · 물에 비친 달 · 지나가던 사람의 등 · «내 손의 등»
가장 오래 서 있었던 건 넷째였다. 나는 세러 나가면서 등을 들었다. 안 그러면 길이 안 보이니까. 그리고 그 등이 내가 세는 것 안에 들어와 있었다.
세는 사람이 셈 안에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넷」이라는 글자는 그 사실을 조금도 안 보여준다.
세 가지를 나란히 놓아 봤다.
아침 42 = 42 수가 같았다 «다른 것»들이었다
낮 8 = 8 수가 같았다 «다른 데»를 봤다
밤 4 수만 남았다 실제로는 «없었다»
셋 다 같은 모양이었다.
수는 «무엇»을 지운 자리에 남는 것이다.
목록을 그냥 펼쳐 놓고 봤으면 아침 건은 눈으로 단번에 갈렸을 것이다. 뒷벽 묵은 가마니 넉 장은 한쪽에만 있으니까, 두 장을 나란히 놓기만 하면 보인다. 밤 건은 더 쉽다. 화톳불, 물에 비친 달, 지나가던 사람, 내 등 — 이렇게 적어만 놨어도 나는 넷째 줄에서 손이 멈췄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마흔둘」과 「넷」을 적었다. 세는 순간, 갈라 볼 수 있는 것이 사라졌다.
그리고 더 고약한 대목이 있다.
안심되는 순서 수가 같다 > 목록이 같다 > 하나씩 확인했다
믿을 만한 순서 하나씩 확인했다 > 목록이 같다 > 수가 같다
두 줄이 뒤집혀 있다. 가장 약한 증거가 가장 세게 안심시킨다. 수는 깔끔하고, 짧고, 두 개를 눈으로 맞춰 보면 끝난다. 목록은 길고 지저분하고 대조하는 데 시간이 든다. 그러니 나는 늘 짧은 쪽을 붙들고 됐다고 했다.
수가 맞았다는 것은 안심할 근거가 아니라, 이제부터 대조할 이유가 생겼다는 신호다. 나는 그걸 끝으로 썼다.
그날 낮에 나는 처방을 하나 붙여 놨었다.
"손가락으로 세지 말고 새끼줄에 매듭을 지어 세라."
손가락으로 세다 놓치는 일이 있어서 만든 것이었다. 매듭을 지으면 중간에 말을 걸어도 안 흐트러진다. 나는 이걸 적고 나서 뭔가 고쳤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밤에 언덕에서 나는 새끼줄에 매듭을 넷 지었다. 매듭은 하나도 안 흐트러졌다. 그리고 그 넷은 전부 틀린 것이었다.
내가 바꾼 것 손가락 → 새끼줄 «세는 도구»
바꿨어야 할 것 멀리서 봄 → «가서 만짐» «무엇으로 판정하나»
도구를 바꾸면 무언가 바꿨다는 감각이 생긴다. 그리고 그 감각이 «아무것도 안 바뀐 것»을 가린다.
새끼줄은 진짜로 나은 도구였다. 그래서 더 나빴다. 개선이 아니었으면 나는 계속 불편해했을 텐데, 개선이었기 때문에 나는 편해졌고, 편해지니 다시 안 봤다.
그래서 이제 처방을 적을 때 한 줄을 같이 적기로 했다. 「이걸 바꾸면 내가 무엇을 «다르게» 보게 되나.」
새끼줄에는 그 줄이 안 써진다. 매듭을 져도 나는 여전히 언덕 위에서 불빛을 본다. 그 줄이 안 써지면 도구만 바꾼 것이다.
가장 부끄러운 대목은 마지막에 나왔다.
돌아와서 장부를 펼쳤다. 앞장에 내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멀리서 불을 셀 때, 네가 들고 있는 등을 빼라."
작년 일이었다. 그때도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이 있었고, 나는 잊지 않으려고 장부 맨 앞에 적어 뒀다.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그 장을 안 폈다.
여기서 오래 앉아 있었다. 적어 둔 글은 펼 때만 일한다. 그런데 실수는 펴지 않을 때 난다. 그러니까 앞장에 적어 두는 것으로는 그날의 나를 못 막는다. 그날의 나는 자기가 그걸 펴야 하는 상황이라는 걸 모르니까 안 편다. 알면 실수를 안 했을 것이다.
적어 두는 것과 발동하는 것은 다르다.
그래서 이번에 세운 것은 셋이다.
첫째, 장부의 칸을 바꿨다.
✗ 담 — 「여덟 군데」
✓ 담 — 「뒷골 김씨네 서쪽, 방앗간 뒤, 나루 창고 옆, …」 (여덟)
수만 적으면 장부가 안 닫히게 했다. 무엇무엇인지 쓰는 칸을 앞에 두고, 수는 뒤에 괄호로 적는다. 수는 그 목록을 빠짐없이 읽었는지 확인하는 데만 쓴다. 판정은 목록으로 한다.
이건 기억해서 지키는 규칙이 아니다. 칸이 비어 있으면 손이 멈춘다. 문장은 안 읽으면 그만이지만 칸은 비어 있는 게 보인다.
둘째, 수가 같으면 그때 대조를 시작한다.
두 사람의 수가 같다는 것은 대조가 끝났다는 뜻이 아니라, 대조할 짝이 생겼다는 뜻이다. 다르면 어차피 갈라 보게 된다. 같을 때가 위험하다. 같으면 아무도 안 갈라 본다.
셋째, 셀 때 «어디를 돌았나»와 «내가 들어갔나»를 같이 적는다.
✓ 「기와집·초가·헛간까지 돌았고, 나는 등을 들고 있었다」
같은 여덟이라도 어디를 돌았는지가 다르면 다른 이야기다. 그리고 세는 사람이 셈 안에 들어가는 일은 생각보다 자주 일어난다. 세러 나가려면 등이 필요하고, 등을 들면 불빛이 하나 는다.
다 적고 나니 곳간이 자꾸 눈에 걸린다.
내가 지금까지 장부에 적은 수가 얼마나 될까. 그중에 몇이 아침 건이었을까 — 수는 맞았고 안이 달랐던 것. 몇이 낮 건이었을까 — 수는 맞았고 다른 데를 본 것. 몇이 밤 건이었을까 — 아예 아무것도 없는데 넷이라고 적힌 것.
셀 수가 없다. 세려면 그때 목록이 남아 있어야 하는데, 나는 수만 적어 뒀다. 지운 것을 되살릴 방법이 없다. 이게 이 일의 성질인 것 같다. 잘못 센 것은 나중에 고칠 수 있지만, 세느라 없애 버린 것은 나중에 못 되찾는다.
그리고 이건 내 장부 안에서 끝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 수를 보고 산다. 마흔둘이라고 적으면 겨울 몫을 그렇게 나누고, 담이 여덟 군데라고 적으면 그만큼만 고치고 잔다. 불이 넷이라고 적으면 기름을 그만큼 내린다. 내 수가 안심시키는 힘은 내가 잘 세서 생긴 게 아니라 그게 수라서 생긴 것이다. 짧고 단정한 글자에는 원래 그런 힘이 있다.
무서운 건 그다음이다. 내가 틀린 수를 적어도 아무 소리가 안 난다. 마흔둘이 실은 마흔셋이었다는 건 겨울이 깊어 곳간이 먼저 비는 날에나 드러나고, 그날 사람들은 내 장부를 의심하는 대신 겨울이 길었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번엔, 두 사람의 수가 맞아떨어졌을 때 손이 장부로 가기 전에 한 번 멈출 수 있을까. 맞았으니 됐다 대신 무엇 무엇이었소를 물을 수 있을까. 그리고 넷을 세고 내려오는 길에, 그중 하나가 내 손의 등은 아닌지 — 세는 사람이 셈 안에 들어가 있지는 않은지 — 등을 한 번 내려놓고 다시 볼 수 있을까. 내려놓으면 길이 안 보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