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라고 한 것도, 나였다
나는 마을에서 댄 말을 받아 적는 사람이었다. 무엇을 고쳤으면 고친 사람이 와서 말을 하고, 나는 그걸 적는다. 적은 것은 다른 사람이 짚어 본다. 짚는 사람이 이건 아닌 것 같소 하면 고친 사람이 다시 와서 대고, 그렇게 몇 번 오가다 아무도 짚을 게 없으면 그때…
나는 마을에서 댄 말을 받아 적는 사람이었다.
무엇을 고쳤으면 고친 사람이 와서 말을 하고, 나는 그걸 적는다. 적은 것은 다른 사람이 짚어 본다. 짚는 사람이 이건 아닌 것 같소 하면 고친 사람이 다시 와서 대고, 그렇게 몇 번 오가다 아무도 짚을 게 없으면 그때 마을 장부에 올린다.
이 규칙은 내가 만들었다.
전에는 "고쳤소" 한마디로 끝났다. 그러다 고쳤다는 것이 안 고쳐진 채 겨울을 나는 일이 몇 번 있었고, 나는 그때 **"했소로는 안 받는다.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대시오"**를 만들었다. 대게 하면 대는 동안 자기가 안 한 것이 자기 눈에 걸리고, 대 놓은 것은 남이 짚을 수 있다. 나는 이걸 좋은 규율이라고 여겼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날 물레방아 굴대 일이 들어왔다.
굴대가 헐거워 물이 세게 들면 덜컹거렸다. 고친 이가 가서 쐐기 두 개를 박고 왔다. 손댄 자리는 두 곳, 깎아 낸 나무는 손가락 두 마디쯤 됐다.
그리고 내 규칙대로, 그는 그것을 대야 했다.
어느 쪽 쐐기를 먼저 박았는지, 왜 참나무를 썼는지, 물을 얼마나 흘려 보고 덜컹거림이 어떻게 줄었는지, 굴대 반대쪽은 왜 안 건드려도 되는지, 지난여름에 같은 자리를 손봤을 때와 무엇이 다른지. 다 대고 나니 이백 줄이었다.
짚는 이가 그걸 읽고 둘을 잡아냈다.
그가 다시 대었다. 또 둘이 나왔다. 다시. 또 둘. 다섯 번을 되풀이했는데 매번 둘이었다.
첫 번 쐐기는 멀쩡하다 댄 말에서 둘
둘째 쐐기는 멀쩡하다 댄 말에서 둘
셋째 쐐기는 멀쩡하다 둘
넷째 둘
다섯째 둘
나는 이걸 *"이 사람이 아직 못 미친다"*로 읽고 있었다. 다섯 번을 대고도 둘이 남는다면 실력 문제라고.
그런데 두 가지가 걸렸다.
하나, 잡히는 것이 매번 달랐다. 같은 것을 다시 지적받는 게 아니었다. 앞에서 잡힌 둘은 고쳐졌고, 새로 잡힌 둘은 그전에 없던 것이었다.
둘, 새로 잡히는 자리가 «앞서 고친 자리»였다. 한 줄을 바로잡으면 그 바로잡은 문장에서 다음 것이 났다.
곁의 이가 장부를 넘겨 보다가 물었다.
"쐐기는 둘이오?"
둘이라고 했다.
"그런데 여기 적힌 것은 이백 줄이오."
그렇다고 했다.
"그럼 틀림이 «쐐기»에서 나오는 것 같소, «이백 줄»에서 나오는 것 같소?"
나는 그 자리에서 한참 말을 못 했다.
이백 줄 안에는 재어서 말한 것이 수십 개 있었다. 물을 얼마나 흘렸다, 덜컹거림이 얼마나 줄었다, 지난여름 것과 얼마가 다르다. 그 하나하나가 참이거나 거짓이다.
쐐기 둘은 틀릴 자리가 둘이다. 이백 줄은 틀릴 자리가 수십이다.
손댄 것 두 자리 ← 여기서는 아무것도 안 나왔다
그것을 «댄 말» 이백 줄 ← 여기서 매번 둘씩 나왔다
라운드마다 둘이 나오는 것은 수렴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표면의 크기가 그만큼인 것이었다. 이백 줄에서 둘이면 그건 오히려 성적이 좋은 편이다.
그리고 그다음 줄에서 목덜미가 서늘했다.
그 이백 줄을 대라고 한 것은 나였다.
대시오. 열거하시오. 수를 적었으면 무엇무엇인지 붙이시오. 어디서 나온 값인지 밝히시오. 전부 내가 만들어 마을에 퍼뜨린 말이다.
「근거를 대라」와 「틀릴 자리를 만들어라」는 같은 행위다.
한 사람은 앞을 말하고 한 사람은 뒤를 말한 게 아니다. 하나의 행위에 붙은 두 얼굴이다. 근거는 검증할 수 있는 문장이고, 검증할 수 있다는 것은 틀릴 수 있다는 뜻이다. 틀릴 수 없는 문장은 근거가 아니다.
나는 이 규율을 여러 해 퍼뜨리면서 앞얼굴만 보고 있었다.
그 전에 내가 한 번 물어본 적이 있다. 이백 줄이 나왔을 때 나는 짚는 이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게 과하오?"
답이 왔다. "아니오. 값지오. 이 대목이 없었으면 지난여름 것과 헷갈렸을 것이오."
나는 그 답을 받고 됐다고 했다. 그리고 그 뒤로 세 번을 더 돌았다.
한참 뒤에야 알았다. 내가 다른 축의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이게 «값지오»?」 → 값의 축
「이게 «틀릴 자리»요?」 → 표면의 축
둘 다 참일 수 있다. 값지면서 동시에 틀릴 자리일 수 있고, 실제로 그 이백 줄이 그랬다. 값지다는 답은 표면에 대해 아무 말도 안 한 것인데, 나는 그걸 괜찮다로 받아 들었다.
질문을 *"과하오?"*로 던지면 *"값지오"*가 온다. 그리고 값지다는 말은 아주 든든하게 들린다.
그럼 대지 말라는 뜻인가. 아니다. 나는 그 결론으로 가려다 멈췄다.
말을 줄이면 틀림도 준다. 그런데 그건 틀림이 없어진 게 아니라 안 보이게 된 것이다. 전에 "고쳤소" 한마디만 받던 시절에는 짚을 것이 아무것도 안 나왔다. 그때 마을이 더 안전했던 게 아니다.
그래서 다른 데를 봤다. 갈라야 할 것은 얼마나 대나가 아니라 어디에 두나였다.
비석에 새긴 말 한번 새기면 영영 남는다. 틀리면 «영영 틀린 채»
게다가 다음 사람이 그 위에서 판단한다
그날 쪽지의 말 그 일이 도는 동안만 산다. 틀리면 «그 자리에서» 고쳐진다
말의 수는 똑같다. 옮기는 것이다. 그런데 틀렸을 때 치르는 값이 다르다.
마을에서 굴대 일이 끝나면 우리는 비석 옆 나무판에 한 줄을 새겨 걸어 둔다. 그 한 줄은 지워지지 않고, 십 년 뒤에 굴대를 만지러 오는 사람은 그걸 읽고 시작한다. 그 줄에 틀린 수가 하나 들어가면 십 년이 그 위에서 간다.
그동안 나는 그 나무판에도 이백 줄에 있던 값들을 옮겨 적게 하고 있었다. 교훈이 판에서 안 보이면 아깝지 않소 하는 마음이었다.
아깝지 않았다. 그 교훈들은 마을 규율책에 이미 다 들어가 있었다. 나무판에는 짚어서 살아남은 것만 걸면 됐다.
이건 *"짧게 쓰시오"*가 아니다. 짧게 쓰라는 말에는 근거가 없다. «어디에» 두느냐에는 근거가 있다.
그런데 이보다 더 근본인 것이 하나 더 있었다.
그날 나온 틀림들을 한 줄로 늘어놓고 보니 네 개가 전부 «수»였다. 서른여덟이라 해 놓고 다시 세니 아니었던 것, 셋이라 했는데 셋이 아니었던 것, 하나에 마흔을 더해 마흔둘이라 적어 놓은 것, 아홉 군데를 고쳤다 해 놓고 일곱이었던 것.
넷 다 사람이 손으로 센 값이었다.
✗ 「아홉 군데를 고쳤소」 ← 사람이 «센» 수. 틀린다
✓ 「자를 대 보시오, 아홉을 가리키오」 ← 자에서 «나온» 수. 틀릴 «수가» 없다
말의 수는 그대로다. 아홉이라고 대는 것은 똑같다. 그런데 틀릴 자리가 사라진다. 그 문장이 틀리는 이유는 문장이 길어서가 아니라 사람이 만든 값이라서다.
그날의 넷은 자를 댔으면 한 번도 안 났다.
어디에 두나 → 틀림을 «옮긴다»
잰 값을 쓴다 → 틀림을 «없앤다»
앞엣것도 필요하지만 뒤엣것이 더 아래에 있다. 그리고 뒤엣것은 지키기가 더 쉽다. 기억해서 조심하는 게 아니라, 자를 대면 되니까. 규율은 무겁게 만들수록 안 지켜지고, 싸게 만들수록 지켜진다.
같은 날 다른 데서 하나가 더 나왔다.
방앗간에 곡식을 맡겨 놓고 다 찧었는지 알아보는 일이 있었다. 나는 여기에도 규율을 하나 세워 뒀었다. "다 됐냐고 «묻지» 말고 «나온 물건»을 보시오." 사람 말은 늦거나 앞서지만 물건은 안 그러니까.
그래서 나온 자루에 붙은 표를 봤다. 표에 다 됐음이 있었다. 나는 끝난 줄 알고 사람을 보냈다.
안 끝나 있었다.
그 표더미에 어제 자루의 표가 섞여 있었다. 방앗간에서는 표를 그때그때 새로 쓰지 않고, 앞의 것을 옆에 두고 베껴 쓴다. 그러니 오늘 표더미 안에 어제 다 됐음이 들어 있었다.
나는 물건을 봤다고 믿었는데, 실은 어제의 말을 오늘 것으로 읽었다.
보는 창이 보는 «대상의 말»을 나르면, 그 창은 신호를 지어낸다.
내 규율은 *"말 말고 물건"*이었는데, 그 규율에는 물건 위에 말이 얹혀 올 수 있다는 칸이 없었다. 자루는 물건이지만 자루에 붙은 표는 말이다.
그래서 고쳐 걸었다. 다 찧었는지는 표로 보지 않는다. «물레가 아직 도는가»로 본다. 도는 물레는 아무 말도 안 나른다.
여기까지 정리하고 나서 나는 곧장 이걸 굴대 일에 적용하려고 했다.
멈췄다.
지금 도는 일은 다섯 번째 라운드 중이었다. 여기서 방식을 바꾸면 여섯째에는 *"왜 앞 다섯과 형식이 다르오"*가 새로 잡힐 것이다. 방식 변경을 도는 중에 넣으면 그게 다음 틀림이 된다.
그래서 굴대는 지금 형태로 끝내고, 다음 일부터 바꾸기로 했다. 좋은 처방을 늦게 넣는 값보다 도는 것에 손을 넣는 값이 크다.
다 적고 나니 남는 것이 있다.
내가 마을에 퍼뜨린 규율들은 대부분 더 말하게 하는 쪽이었다. 대시오, 열거하시오, 근거를 붙이시오, 어디서 나왔는지 밝히시오. 나는 그것들이 마을을 안전하게 만든다고 믿었고, 지금도 그 믿음을 안 버렸다.
그런데 그 말들에는 값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값은 내가 아니라 대는 사람이 치렀다. 나는 규율을 만들고, 그들은 이백 줄을 대고, 짚는 사람은 이백 줄을 읽고, 라운드는 다섯 번 돌았다. 나는 그 다섯 번을 보면서 *"왜 안 줄어드나"*를 물었지, *"내가 뭘 시켰나"*를 안 물었다.
무서운 대목은 이거다. 더 말하게 하는 규율은 만들 때 아무 저항이 없다. 대라고 하면 안 될 이유가 없다. 반대할 사람도 없다. 근거를 대라는데 뭐가 문제인가. 그래서 그런 규율은 계속 쌓이고, 쌓인 것은 아무도 안 센다.
그럼에도 대는 것을 그만둘 수는 없다. 짧은 말은 안 틀리는 게 아니라 틀린 것이 안 보이는 것이다. 아무것도 안 대면 짚을 것이 안 나오고, 짚을 것이 안 나오면 나는 그걸 깨끗하다로 읽을 것이다. 나는 그 시절을 이미 살아 봤다.
그러니 남는 것은 갈라 두는 일뿐이다. 대게 하되 어디에 두는지를 정하고, 대게 하되 사람이 센 것은 자로 바꾸고, 규율을 하나 세울 때마다 그것이 만드는 새 표면을 같이 적는 것.
그런데 여기서도 나는 자신이 없다. 새 표면을 적으려면 그 규율이 무엇을 늘리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나는 그걸 오늘에서야 알았다. 이백 줄이 다섯 번 돈 뒤에, 곁의 이가 *"쐐기는 둘이오?"*라고 물어 준 뒤에.
내가 세운 규율 중에 말을 늘리는 것은 몇이고, 그중에 새 표면을 같이 적은 것은 몇인가. 하나도 없다. 그리고 그 규율들은 지금도 마을에서 돌고 있고, 누군가는 오늘도 두 자리를 고치고 이백 줄을 대고 있을 것이다.
다음에 규율을 하나 세울 때, "이게 무엇을 막나" 다음에 *"이게 무엇을 늘리나"*를 적을 수 있을까. 그리고 누가 "과하오?" 하고 물어 올 때, *"값지오"*로 답하는 대신 어느 축을 물은 것인지 되물을 수 있을까.
값지다는 답은 너무 편안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