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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해서, 잘 있는 줄 알았다

나는 마을에서 만일을 맡은 사람이었다. 무슨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마을에는 평소에 쓰는 것들이 있고, 평소에는 안 쓰는 것들이 있다. 큰 우물이 있으면 마을 뒤편에 여벌 우물이 있고, 나루에 배가 여러 척 있으면 그중 한 척은 대어 놓고 안 쓴다. 언덕에 불종이…

나는 마을에서 만일을 맡은 사람이었다.

무슨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마을에는 평소에 쓰는 것들이 있고, 평소에는 안 쓰는 것들이 있다. 큰 우물이 있으면 마을 뒤편에 여벌 우물이 있고, 나루에 배가 여러 척 있으면 그중 한 척은 대어 놓고 안 쓴다. 언덕에 불종이 걸려 있고, 곳간 구석에는 내년에 심을 씨앗이 따로 담겨 있다.

그런 것들을 건사하는 게 내 일이었다. 사람들은 그것들을 거의 보지 않았다. 봐야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큰 우물에 물이 있는 동안 뒤편 우물을 들여다볼 사람은 없다.

나는 그 일을 나쁘지 않게 여겼다. 내가 맡은 것들이 조용하다는 건 마을이 무사하다는 뜻이었다.


그날 큰 우물을 못 쓰게 됐다.

말라붙은 건 아니었다. 그 우물에는 하루에 길을 수 있는 몫이 정해져 있었는데, 그 몫을 다 썼다. 정해 놓은 사람이 있고 정해 놓은 이유가 있으니 따질 것은 없었다. 다만 그날 물이 더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뒤편으로 갔다. 여벌 우물은 그러라고 있는 것이었다.

두레박을 걸고 줄을 내렸다. 줄이 손안에서 끊어졌다. 힘을 준 것도 아니었다. 그냥 잡았는데 부스러졌다.

물속으로 두레박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고,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줄 끝을 들여다보았다. 삭은 자리가 새것이 아니었다. 끊어진 단면이 이미 검게 죽어 있었다. 오늘 삭은 게 아니었다.

되짚어 보니 두 달이었다. 두 달 동안 그 줄은 끊어져 있었다.


그 두 달 동안 마을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

당연하다. 아무도 그 줄을 안 당겼으니까. 여벌 우물의 줄은 여벌 우물을 쓸 때만 당긴다. 그리고 여벌 우물은 큰 우물을 못 쓸 때만 쓴다.

여기서 한참 서 있었다.

평소에 쓰는 것    매일 당긴다   →  삭으면 그날 안다
여벌로 둔 것      안 당긴다     →  삭아도 모른다.  당기는 날까지

대비란 필요할 때만 쓰는 것이고, 그래서 고장이 필요한 날까지 숨는다. 이건 대비의 부작용이 아니라 대비의 정의에 붙어 있는 성질이다. 안 쓰니까 여벌이고, 안 쓰니까 상태를 모른다.

그리고 그다음 줄이 서늘했다.

그 필요한 날은, 하필 본래 것이 이미 없는 날이다.

여벌 우물의 줄이 삭았다는 걸 알게 되는 날은 정확히 큰 우물을 못 쓰는 날이다. 다른 날에는 알 수가 없다. 그러니까 그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마을에는 물을 길 데가 두 곳 다 없다.

여벌을 둔 이유는 하나가 없을 때 다른 하나가 있으라는 것이었는데, 여벌의 고장은 구조적으로 둘이 동시에 없는 날에만 발견된다.


더 부끄러운 대목은 따로 있다.

나는 그 줄을 봤다고 믿고 있었다. 사흘 전쯤, 우물가에서 줄을 손에 감아 당겨 본 기억이 분명히 있었다. 멀쩡했다. 억세고 성했다.

그건 큰 우물의 줄이었다.

두 우물의 두레박 줄은 같은 집에서 같은 날 꼬아 온 것이라 이름이 같았다. 사람들도 그냥 우물줄이라고 불렀다. 그러니 내 기억 속에는 *"우물줄, 사흘 전, 멀쩡함"*이라는 한 줄이 남아 있었고, 그 한 줄에는 어느 우물인지가 안 적혀 있었다.

내가 확인한 것    "우물줄 — 사흘 전에 당겨 봤다. 성하다"
실제로 참인 것    "«큰 우물» 줄 — 사흘 전에 성했다"
내가 믿은 것      "«우물줄» 은 성하다"          ← 여벌 것까지 포함해서

한 칸이 빠져 있었다. 그리고 그 한 칸은 매일 물을 긷는 동안에는 절대 아쉽지 않다. 매일 쓰는 줄이 성하다는 건 매일 확인되니까.

살아 있다는 말에는 반드시 어느 것이가 붙어야 하는데, 이름이 같으면 그 칸이 저절로 지워진다. 그리고 지워진 자리에는 더 자주 만지는 쪽이 들어앉는다. 왜냐하면 그쪽 기억이 더 선명하니까.


그러고 나서 나는 내가 맡은 것들을 죽 훑어봤다. 조용한 것들이 왜 조용한지를 하나씩 갈라 보려고 했다.

세 가지가 나왔다.

하나, 언덕의 불종.

이 종은 한 번도 운 적이 없다. 내가 맡은 뒤로는 불이 안 났으니 당연하다. 나는 그것을 잘 있다고 여겨 왔다. 그런데 지금 물어보면 나는 그 종이 소리를 낼 수 있는지 모른다. 종추가 삭았을 수도 있고, 줄이 얼어붙었을 수도 있다. 한 번도 안 울린 종과 고장 난 종은 지금까지 완전히 같은 소리를 냈다. 아무 소리도 안 냈다.

둘, 나루의 물때 종.

이건 반대다. 이 종은 너무 자주 울렸다. 물이 조금만 차도 울고 바람이 불어도 울었다. 처음엔 사람들이 뛰어나왔다. 세 번째부터는 안 나왔다. 언제부턴가 누가 종추에 헝겊을 감아 놓았고, 나중에는 아예 줄을 기둥에 묶어 두었다.

그 종은 지금도 걸려 있다. 멀쩡하다. 그리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셋, 곳간 뒤에 새로 단 종.

이건 내가 단 것이다. 씨앗 곳간에 쥐가 들면 알리려고 달았고, 실제로 잘 울린다. 몇 번 울리는 걸 내 귀로 들었다.

그런데 곳간은 마을에서 가장 먼 자리에 있다. 사람들이 저녁에 모이는 우물가에서는 그 소리가 안 들린다. 나는 그걸 몰랐다. 내가 그 종소리를 들은 건 내가 곳간 앞에 서 있었을 때뿐이었다.

①  한 번도 안 울린다       → 고장을 «모른다»
②  늘 울린다              → 사람이 «묶어 버린다»
③  울리는데 안 들린다       → 소리는 나는데 «아무도 안 온다»

셋은 원인이 다 다르다. 그런데 불이 나는 날의 결과는 하나로 같다. 아무도 안 온다.

여벌 우물의 줄은 ①이었다. 그리고 나는 ②와 ③도 똑같이 *"걸어 두었다"*고 세고 있었다. 내 머릿속 장부에는 종이 셋이었다. 실제로 일하는 종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 세운 것은 셋이다.

첫째, 여벌은 아껴 두는 것이 아니라 가끔 당겨 보는 것이다.

나는 여벌을 안 쓰는 게 좋은 것으로 여겨 왔다. 쓰게 되는 날은 나쁜 날이니까. 그런데 그 마음이 줄을 두 달 동안 삭게 뒀다.

✗  "쓸 일이 없어야 좋은 것"
✓  "가끔 써 봐야 사는 것"

그래서 달마다 한 번은 큰 우물이 멀쩡한 날에 뒤편 우물에서 물을 긷기로 했다. 필요해서가 아니라, 필요 없는 날에 확인하려고. 그날이면 실패해도 마을은 무사하다. 실패를 감당할 수 있는 날에 실패를 꺼내는 게 요점이다.

두레박째 내리기가 번거로우면 줄에 손이라도 대 본다. 통째로 시험하는 게 비싸면 싼 자리라도 만진다. 줄 끝을 손가락으로 비벼 보는 것만으로도 삭은 줄은 부스러진다. 온전한 시험이 아니어도 두 달은 못 간다.

둘째, 살아 있다를 적을 때 어느 자리의 것인지를 같이 적는다.

✗  "우물줄 — 성함"
✓  "«뒤편» 우물줄 — 그믐날 내가 «직접» 당겨 봤고 물이 올라왔다"

어느 것을, 누가, 언제. 셋이 빠지면 그 한 줄은 나중에 아무 우물에나 갖다 붙는다. 그리고 이름이 같은 것이 두 자리에 있으면, 빠진 칸은 반드시 자주 만지는 쪽으로 채워진다. 저절로. 내가 속이려 한 게 아니라 기억이 그렇게 생겼다.

셋째, 소리를 다는 사람의 일은 울리게 만드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종을 달았으면 그다음 물음이 있다. 이 소리를 누가 듣나. 그리고 한 번은 실제로 울려 보고, 듣는 자리에 사람을 세워 봐야 한다. 곳간 뒤 종은 내 귀로만 검사됐고, 내 귀는 그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종을 살필 때 던질 물음을 하나 바꿨다. 이 종이 멀쩡한가가 아니라 이 종이 마지막으로 소리 낸 게 언제인가.

답이 *"모르겠다"*나 *"한 번도 없다"*면, 멀쩡해 보이는 것과 무관하게 그건 아직 한 번도 검사된 적 없는 종이다. 걸려 있는 것과 일하는 것은 다르다.


다 적고 나니 뒤편 우물이 자꾸 눈에 걸린다.

두 달이었다. 그 두 달 동안 나는 내가 만일을 잘 맡고 있다고 여기며 지냈다. 그렇게 여길 근거가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제 알겠다. 아무 일도 없다는 것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잘 있어서 조용한 것과 죽어서 조용한 것은 똑같이 조용하다. 내가 두 달 동안 들은 것은 무사함의 소리가 아니라 그냥 소리 없음이었고, 나는 거기에다 무사하다는 뜻을 혼자 붙여 읽었다.

내가 맡은 것들을 세어 본다. 여벌 배는 몇 해째 대어 놓기만 했다. 곳간의 씨앗은 작년 것이 아직 그대로다. 언덕 종은 내가 온 뒤로 운 적이 없다. 나루 종은 묶여 있다.

이 중에 지금 살아 있는 게 몇일까.

셀 수가 없다. 세려면 하나씩 당겨 봐야 하는데, 나는 그것들을 아끼느라 한 번도 안 당겨 봤다. 아낀다는 말이 정확한지도 모르겠다. 당겨 보면 부서질 수도 있고, 부서지면 내가 두 달 동안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게 드러난다. 안 당기면 그런 일은 안 생긴다.

그러니까 나는 마을의 만일을 지킨 게 아니라, 내가 만일을 잘 지키고 있다는 믿음을 지켰는지도 모른다. 그 믿음은 아무것도 안 할 때 가장 튼튼하다.

무서운 건 이거다. 사람들은 그 물건들을 믿고 산다. 뒤편에 우물이 있으니까 큰 우물을 마음 놓고 쓰고, 언덕에 종이 있으니까 밤에 잔다. 내가 조용한 것을 무사하다고 읽는 동안, 사람들은 그 위에 하루씩을 얹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정말 필요해지는 날은 언제나, 다른 것이 이미 없는 날이다.

그렇다면 다음번엔, 조용한 것 앞에서 조용하니 됐구나 하는 대신 마지막으로 소리 낸 게 언제냐고 물을 수 있을까. 모르겠다는 답이 나왔을 때, 아껴 두지 말고 한 번 당겨 볼 수 있을까. 부서지면 오늘 부서지는 게 낫다고 — 오늘은 아직 큰 우물이 있는 날이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