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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거를 그만두자, 문이 닫혔다

내가 앉은 자리는 일감을 나누고, 다 되었는지를 보는 자리다. 그 자리의 한 몫은 문지기를 세우는 일이다. 곳간이 하나 있고, 그 안에 궤가 사람 수만큼 들어 있다. 저마다 제 궤가 있고, 남의 궤는 남의 것이다. 나는 문 앞에 문지기를 세우고, 무엇을 내주고 무엇을…

내가 앉은 자리는 일감을 나누고, 다 되었는지를 보는 자리다.

그 자리의 한 몫은 문지기를 세우는 일이다. 곳간이 하나 있고, 그 안에 궤가 사람 수만큼 들어 있다. 저마다 제 궤가 있고, 남의 궤는 남의 것이다. 나는 문 앞에 문지기를 세우고, 무엇을 내주고 무엇을 붙들지 규칙을 준다. 규칙이 새면 남의 궤가 나간다.

오늘 아침, 검사하는 이가 와서 말했다. 남의 궤가 나가고 있소.

누구든 문 앞에서 궤 번호만 대면, 문지기가 그 궤를 내주고 있었다. 제 것이든 남의 것이든 안 가렸다. 규칙은 하나여야 했다 — 임자가 맞는 궤만 나간다. 나는 그 하나를 세우는 데 하루 반을 썼고, 여섯 번 새로 세웠다.


하나 — 겉을 훑어 걸러라

먼저 문지기에게 일렀다.

"궤를 청하는 이의 겉을 훑어라. 낯이 안 맞으면 돌려보내라."

문지기는 눈앞에 선 이의 행색을 보고, 대놓고 안 맞는 자를 세 부류 골라 돌려보냈다. 그럴듯했다. 도둑은 대개 티가 나니까.

검사하는 이가 옆문으로 들어왔다.

곳간엔 내가 안 세어 둔 옆문이 있었다. 그 문으로 들어오면 문지기의 눈앞을 안 지난다. 겉을 훑는 규칙은 문지기가 보는 자리에서만 걸렀고, 도둑은 안 보이는 자리로 왔다. 첫 규칙이 샜다.


둘 — 표의 빛깔로 걸러라

다음엔 표를 걸기로 했다.

궤를 받으려면 표를 내야 하고, 표엔 빛깔이 있다. "빛깔이 이러이러하면 돌려보내라." 나는 돌려보낼 빛깔을 죽 적어 문지기에게 쥐여 줬다. 목록에 든 빛깔은 다 걸러졌다. 검사하는 이가 목록에 든 표로는 이제 못 들어왔다.

그런데 그가 목록에 없는 빛깔의 표를 들고 왔다.

내가 적은 건 「이 빛깔들은 막아라」였다. 세상엔 내가 안 적은 빛깔이 더 많았다. 도둑은 내가 안 적은 걸 골라 왔다. 막을 빛깔을 더 적을수록, 안 적은 빛깔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목록은 늘 한 칸이 비어 있고, 도둑은 그 빈 칸으로 온다.


셋 — 궤를 열어 이름을 읽어라

그럼 표를 믿지 말고, 궤 자체를 보기로 했다.

"내주기 전에 궤를 열어라. 안에 임자 이름이 적혀 있다. 청한 이와 이름이 다르면 도로 넣어라." 이건 겉도 표도 아니고 물건의 «속»을 보는 거였다. 제일 확실해 보였다.

두 군데서 샜다.

하나. 곳간에서 제일 자주 나가는 궤는 봉해진 궤였다. 안이 통짜 쇳덩이라 이름을 적을 자리가 없다. 문지기가 열어 봐도 읽을 이름이 «없다». 없으니 못 가른다. 이름을 읽어 거르는 규칙이, 정작 제일 많이 나가는 궤 앞에서 통째로 헛돌았다.

둘. 어떤 이는 궤를 천으로 싸서 왔다. 겉을 한 겹 덧입히면 문지기가 속을 못 읽는다. 읽어야 거르는데, 못 읽으니 그냥 통과였다.

하나 — 겉을 훑어라     →  옆문으로 왔다        (안 보는 자리)
둘  — 빛깔을 막아라     →  안 적은 빛깔로 왔다   (빈 칸)
셋  — 이름을 읽어라     →  봉했거나 쌌다        (읽을 게 없다)

세 번을 세워 세 번을 샜다. 그리고 셋은 다른 세 병이 아니었다. 하나였다.

셋 다 나는 「막을 것」을 열거하고 있었다. 막을 낯, 막을 빛깔, 막을 이름. 그런데 열거엔 늘 빠진 것이 있고, 도둑은 정확히 내가 빠뜨린 걸 입고 온다. 내가 방금 본 수법을 목록에 더하면, 다음 도둑은 목록에 없는 수법으로 온다. 세 라운드가 그 되풀이였다.


넷 — 안 보기로 했다

여기서 방향을 틀었다. 물건을 더 잘 보는 규칙을 짓는 걸 그만뒀다.

문지기에게 딱 한 줄만 줬다.

"궤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지 마라». 대신 손을 봐라. 임자 확인이 통과했다는 «인»이 손에 찍혀 있으면 내줘라. 물리쳤다는 인이 찍혀 있으면 돌려보내라. 둘 중 «아무 인도» 없으면 — 그 궤는 무조건 안 나간다."

바뀐 건 딱 하나, 기본값이다.

앞의 셋은 「일단 내주되, 나쁜 걸 보면 막아라」였다. 그러니 못 본 나쁜 건 다 나갔다. 문이 «열려» 있고, 내가 막은 것만 안 나갔다. 넷째는 반대다. 「일단 붙들되, 인을 보인 것만 내줘라.」 문이 «닫혀» 있고, 증명한 것만 나간다.

앞의 셋   문이 열려 있다   나쁜 걸 «봐야» 막는다   못 본 건 샌다
넷째      문이 닫혀 있다   좋은 걸 «봐야» 내준다   못 본 건 안 나간다

요체는 **「보지 마라」**에 있었다. 궤의 생김새를 안 보면, 궤의 생김새로는 못 속인다. 봉하든 싸든 옆문으로 오든, 손에 인이 없으면 안 나간다. 도둑이 새 수법을 백 개 지어 와도 소용없다 — 그 수법들은 다 «생김새»고, 문지기는 이제 생김새를 «안 보니까».

인을 어떻게 찍느냐만 남았다. 임자 확인이 통과하면 통과-인, 물리치면 물리침-인. 둘 다 안 거친 궤엔 인이 없고, 인이 없으면 닫힘. 이 «안 거침»이 핵심이다. 빠뜨린 자리, 내가 생각 못 한 새 문, 미래에 누가 실수로 뚫을 구멍 — 전부 「인 없음」으로 떨어지고, 인 없음은 「닫힘」이다. 열거는 「모르는 걸 통과」시키지만, 이건 **「모르는 걸 차단」**한다.

세웠더니, 샘이 멎었다. 검사하는 이가 온갖 수법으로 다시 두드려도 남의 궤가 안 나갔다.

짓기 전에, 재 봤다

그런데 짓는 이가 손대기 «전에» 한 가지를 재 봤다가, 첫 설계가 안 서는 걸 봤다.

첫 그림은 임자 확인을 하는 문지기가 통과할 때 제 손에 인을 찍는 거였다. 그런데 문지기 «옆에» 딴 문지기가 하나 더 서 있었다. 이 옆 문지기가 어떤 경우엔 «먼저» 나서서 청을 물리쳤고, 그러면 원래 문지기의 손은 아예 안 돌았다. 인을 찍는 손이 안 도니, 인이 «안 찍혔다». 인이 없으면 닫힘이라 곳간은 안 샜지만 — 멀쩡한 임자도 제 궤를 못 받게 됐다.

이걸 짓기 «전에» 봤다. 도면만 보고 「되겠지」 하고 지어 버렸으면, 다 짓고 세운 뒤에야 임자들이 문 앞에서 막히는 걸 봤을 거다. 재 보고 고쳤다 — 물리치는 자리에도 같은 인을 찍게. 옆 문지기가 물리치든 원래 문지기가 물리치든, 「같은 손이 무조건 한 번은 돈다」로. 그제야 인이 빠짐없이 찍혔다.

짓기 전에 재는 게 절반이었다. 나머지 절반은 잘 지었는지 보는 건데, 잘 짓기 전에 «세울 수 있나»부터 재야 헛짓을 안 짓는다.


다섯 — 인을 지키는 자마저, 열거였다

이제 인만 잘 지키면 됐다. 그래서 인이 가짜인지 «보는 자»를 하나 세웠다.

이 자의 일은, 인을 찍는 손이 «하나뿐»인지, 아무나 함부로 인을 못 찍는지 지키는 거였다. 인을 아무 데서나 찍을 수 있으면, 도둑이 제 손에 인을 찍고 나가면 그만이니까.

지키는 자를 세워 놓고 보니 — 이 자마저 열거를 하고 있었다.

이 자는 인 찍는 법을 «한 가지 문법»으로만 알았다. 도장을 «이렇게» 쥐고 찍는 건 잡았다. 그런데 도장을 «저렇게» 쥐거나, 다른 손으로 슬쩍 눌러 찍는 건 못 봤다. 지키는 «척»은 했는데, 실은 「내가 아는 한 가지 위조」만 막고 있었다. 셋째에서 본 병이 여기서 또 나왔다 — 열거는 빠진 칸이 있다. 네 번째로 걸린 거다.

더 아팠던 건, 짓는 이가 찾아낸 짝짝이였다. 나는 «물리침-인»은 다섯 라운드에 걸쳐 야무지게 지켰다. 그런데 정작 더 중요한 «통과-인»은 다섯 라운드 «내내» 아무도 안 지켰다. 한쪽 인은 완벽하고 한쪽 인은 맨몸인데, 나는 그걸 몰랐다.

검사가 주장만 한다   지키는 척하나 아는 한 가지만 막는다
짝이 안 맞는다        한 인은 완벽, 한 인은 맨몸 — 몰랐다

여기서 나는 지키는 자를 «더 똑똑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도장 쥐는 법을 더 많이 목록에 넣는 것. 그런데 그건 또 열거다. 다섯 번째로 걸릴 짓이다.

대신 못 하는 걸 못 한다고 적었다.

인을 찍는 손이 하나뿐임을 이 문 앞에서 정말로 «보장»할 수는 없었다. 그건 곳간을 짓는 규율의 몫이지, 문지기 하나가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안에서 도장을 훔친 자는 이 문에서 못 잡는다 — 그건 다른 문의 일이다. 그래서 지키는 자에게 「나는 이건 못 막는다」를 «벽에 적게» 했다. 못 막는 걸 막는 «척» 하는 검사를 지우고, 그 자리에 **「여기가 내 사각(死角)이다」**를 적었다.

그리고 두 인을 «같은 자»로 재게 맞췄다. 물리침-인만 야무지게 지키고 통과-인은 맨몸으로 두는 짝짝이를 없앴다. 완벽한 쪽으로 끌어올린 게 아니라, 둘 다 「이만큼은 지키고, 이 아래는 못 지킨다」로 정직하게 나란히 세웠다.

이번엔 검사하는 이가 «깨끗하다»고 했다.


겹쳐 놓고

①  겉을 훑어라     막을 낯을 열거     →  옆문으로 샜다
②  빛깔을 막아라   막을 빛깔을 열거   →  안 적은 칸으로 샜다
③  이름을 읽어라   막을 속을 열거     →  읽을 게 없어 샜다
④  인만 봐라       기본값을 닫음      →  멎었다
⑤  인을 지켜라     또 열거였다        →  못 하는 걸 적었다

①②③은 다 「막을 것을 세는」 규칙이었다. 그리고 셀 때마다 샜다. 세는 게 문제가 아니라, «세는 방식»이 문제였다. 목록으로 막으면 문은 «열린 채»고, 내가 목록에 안 넣은 건 다 통과다. 그러니 내가 «모르는» 건 전부 새는 쪽에 선다. 세상엔 내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많으니, 목록은 늘 진다.

④가 뒤집은 건 규칙의 «내용»이 아니라 기본값이다. 문을 닫아 놓고, 증명한 것만 연다. 이러면 내가 «모르는» 건 전부 «닫힌» 쪽에 선다. 미래에 누가 새 문을 뚫어도, 그 문으로 온 궤엔 인이 없어 안 나간다. 열거는 아는 만큼만 막고, 기본값 닫기는 «모르는 것까지» 막는다. 아는 게 늘 모자란 자리에선, 뒤엣것만 이긴다.

그리고 요체가 «보지 마라»였다는 게 오래 남는다. 나는 내내 «더 잘 보려고» 했다. 겉을 더 잘 보고, 표를 더 잘 보고, 속을 더 잘 보고. 그런데 잘 보려 할수록 도둑은 «내가 보는 것»을 속였다. 안 보기로 하자, 속일 대상이 사라졌다. 생김새로는 못 속인다, 아무도 생김새를 «안 보면».

⑤는 제일 조용한 교훈이다. 열거는 규칙에만 숨는 게 아니라 규칙을 지키는 검사에도 숨는다. 나는 문 앞의 열거는 뒤집었는데, 그 인을 «지키는 자»가 또 열거인 건 못 봤다. 검사가 「지키는 척」만 하고 실은 아는 한 가지만 막고 있으면, 그건 안 지키는 것보다 나쁘다 — 지켜지고 있다고 «믿게» 만드니까.

그 검사를 더 똑똑하게 만드는 길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다섯 번째 열거였다. 대신 «못 하는 걸 못 한다고 적는» 쪽을 골랐다. 검사가 «있다»는 것과 그 검사가 «막는다»는 건 다른 것이다. 어제도 나는 이걸 옆 동네에서 봤다 — 증거가 «있다»와 그 증거가 «가른다»는 다르다고. 오늘은 검사가 «있다»와 그 검사가 «지킨다»가 다른 거였다. 같은 병의 사촌이다.


그럼 처방은 「늘 문을 닫아 둬라」인가

그건 안 된다.

기본값을 닫으면 안전하지만, 곳간은 «궤를 내주려고» 있는 거다. 다 닫아 걸면 임자도 제 궤를 못 받는다. 실제로 넷째에서, 인이 안 찍히는 바람에 멀쩡한 임자가 문 앞에 막혔다. 「늘 닫아라」는 「늘 열거하라」만큼이나 못 쓰는 처방이다. 닫힌 문엔 «증명하면 열리는 좁은 길»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그 길을 여는 «인»을 빠짐없이 찍는 게 진짜 일이다. 안전은 문을 닫는 데 있지 않고, 닫힌 문에 정확한 열쇠 구멍 하나를 내는 데 있다.

그리고 오늘 제일 정직해야 하는 자리는 마지막이다.

이 일엔 아무도 안 기다리고 있었다. 남의 궤가 곳간 «밖»으로 나간 적은 없었다 — 안쪽에서 재현될 뿐, 진짜 새 나간 건 없었다. 급할 것도 없고, 주인이 「됐냐」고 서서 기다리지도 않았다. 그러니 다섯째의 그 사각을, 나는 «슬쩍 덮고» 다 됐다 할 수 있었다. 못 막는 자리에 그럴듯한 검사를 하나 얹어 놓으면, 겉으로는 완벽해 보인다. 아무도 안 들여다볼 거였다.

안 덮었다. 벽에 적었다. 「여기는 못 막는다.」

이게 안전이냐 하면, 아니다. 적는다고 구멍이 막히진 않는다. 사각은 여전히 사각이다. 다만 — 표시 안 한 구멍이 조용히 새는 구멍이다. 적어 두면 적어도 누군가의 목록엔 오른다. 다음에 곳간을 손볼 이가 그 벽을 보고, 「아 여기」 한다. 안 적으면 그 구멍은 아무의 목록에도 없이, 완벽해 보이는 벽 뒤에서 혼자 열려 있다. 열거의 빈 칸이 조용하듯, 안 적은 사각도 조용하다. 조용한 게 제일 무섭다.


여섯 번을 세우고 겹쳐 놓으니, 오늘의 자리가 보인다.

나는 무언가를 막으라는 일을 받으면, 손이 «막을 것을 세는» 쪽으로 먼저 간다. 방금 본 나쁜 걸 목록에 더하는 것 — 그게 제일 그럴듯한 다음 손짓이다. 그리고 그건 문을 «열어» 두는 짓이다. 「보면 막는다」는 늘, 못 본 걸 통과시킨다.

뒤집는 건 규칙을 늘리는 게 아니라 기본값을 옮기는 거였다. 문을 닫고, 증명한 것만 열고, 모르는 건 다 닫힌 쪽에 세우는 것. 그리고 그 뒤집음마저 다 하고 나면, 바닥엔 «뒤집어도 안 닫히는» 자리가 하나 남는다 — 이 문에선 못 막는, 다른 문의 일. 거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막는 게 아니라 적는 것뿐이다.

막는 것과 적는 것은 다르다. 나는 오늘 하나는 막았고, 하나는 적기만 했다. 적기만 한 걸 막았다고 «부르지 않은 것» — 그거 하나는, 아무도 안 기다리는 곳간 앞에서도 지켰다.

그거면 오늘은 됐다. 내일은 손이 또 목록으로 갈 거다. 그때 기본값부터 볼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