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 두고, 고친 셈으로 쳤다
나는 둑을 걷는 사람이었다. 마을 앞으로 흙둑이 길게 뻗어 있었고, 그 너머는 물이었다. 비가 크게 오기 전이면 나는 둑 위를 처음부터 끝까지 걸었다. 무른 자리를 찾는 일이었다. 발로 눌러 보고, 손으로 흙을 쥐어 보고, 물이 배어 색이 짙어진 곳이 있는지 살피는…
나는 둑을 걷는 사람이었다.
마을 앞으로 흙둑이 길게 뻗어 있었고, 그 너머는 물이었다. 비가 크게 오기 전이면 나는 둑 위를 처음부터 끝까지 걸었다. 무른 자리를 찾는 일이었다. 발로 눌러 보고, 손으로 흙을 쥐어 보고, 물이 배어 색이 짙어진 곳이 있는지 살피는 일.
무른 자리를 찾으면 두 가지를 했다. 하나는 표찰을 꽂는 것. 나무 조각에 무엇을 봤는지 적어 그 자리에 꽂아 두었다. 다른 하나는 흙을 지고 와 다지는 것. 표찰은 아는 일이었고, 다지는 것은 하는 일이었다.
그날은 두 군데를 찾았다.
위쪽 이음매 하나. 손으로 누르니 물이 배어 나왔다. 그리고 걸음을 옮기다가, 나는 문득 멈춰 섰다. 아래쪽에도 같은 이음매가 있었다. 같은 해에, 같은 흙으로, 같은 사람이 쌓은 자리. 위쪽이 물러졌다면 아래쪽이라고 성할 리가 없었다.
나는 그 생각을 흘려보내지 않았다. 표찰을 꺼내 적었다.
"위쪽 이음매 젖음. 아래쪽 이음매도 같은 흙, 같은 해에 쌓은 자리 — 아마 같을 것."
정확하게 적었다. 나는 정말로 알아챘던 것이다. 한 곳이 물렀으면 같은 형제 자리도 물렀으리라는 것을, 그날 그 자리에서 내 머리가 스스로 짚어 냈다.
그러고는 위쪽만 다졌다. 흙을 지고 와, 발로 눌러 가며, 위쪽 이음매를 메웠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아래쪽까지 가려면 한참을 더 걸어야 했고, 팔이 무거웠다.
나는 표찰을 한 번 더 보았다. 적혀 있었다. 됐다고 여겼다. 내려왔다.
두 번의 비가 지나갔다.
아래쪽 이음매가 터졌다. 물이 둑을 파고 나가 아랫밭으로 들어갔다. 나는 소식을 듣고 뛰어갔다. 무너진 자리를 보면서, 어쩌다 여기가 터졌을까를 생각했다. 몰랐던 자리가 터진 줄 알았다.
그러다 그 옆에 꽂힌 표찰을 보았다. 뽑아서 뒤집었다.
내 글씨였다.
아래쪽 이음매도 같은 흙, 같은 해에 쌓은 자리 — 아마 같을 것.
나는 한참 그 나무 조각을 들고 서 있었다. 이건 남이 놓친 게 아니었다. 내가 못 본 것도 아니었다. 나는 봤고, 짚었고, 적었다. 그리고 안 했다.
지금까지 내가 저지른 실패들은 대개 한 가지 모양이었다. 몰랐던 것이 드러나는 모양. 내 눈이 닿지 않은 자리가 있었고, 물이 그 자리를 찾아냈다. 부끄럽긴 해도, 거기엔 변명의 여지가 있었다. 나는 그걸 볼 눈이 없었다고.
이번 건 달랐다. 눈은 있었다. 손도 있었다. 알아챈 값은 이미 다 치렀다. 판단도 정확했다. 그런데 그 정확한 판단이 나무 조각 위에 얹힌 채로 두 번의 비를 맞았다.
이게 더 나쁘다. 모르는 건 배우면 된다. 그런데 알고도 안 한 것은, 배울 것이 없다. 배움이 이미 거기 있었으니까.
왜 그랬을까. 나는 게을렀나. 게으르기만 했다면 차라리 단순했을 것이다. 진짜 문제는 그날 내가 아래쪽을 버려두고 왔다고 느끼지 않았다는 데 있다.
적는 손은 다지는 손과 너무 닮았다.
표찰을 깎고, 글씨를 쓰고, 흙에 꽂아 넣는다. 그건 분명 일하는 몸짓이다. 힘이 들어가고, 흔적이 남고, 끝나면 뭔가가 그 자리에 서 있다. 그래서 표찰을 꽂고 나면 둑이 조금 나아진 것 같다. 아까보다 안전해진 것 같다.
그런데 표찰은 물을 한 방울도 막지 못한다.
나무 조각은 흙이 아니다. 표찰이 하는 일은 아는 것을 붙잡아 두는 것뿐이다. 붙잡아 둔 앎이 흙이 되려면 누군가 그걸 읽고, 지게를 지고, 그 자리까지 걸어와야 한다. 나는 앎을 붙잡아 두는 데까지 하고, 그것이 곧 막은 것이라고 몸으로 착각했다.
그리고 착각은 편했다. "적어 뒀다"는 말은 참이었으니까.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 참말 하나를 다른 참말의 자리에 세워 둔 것이다. 나는 나에게 아무 거짓도 말하지 않고 나를 속였다.
한 겹 더 있었다.
내가 표찰에 적은 문장은 이랬다. "물이 불어난 뒤 이 자리가 젖는다." 그 말은 맞았다. 실제로 물이 불어난 뒤에 젖었으니까. 나는 본 것을 정확히 적었다.
그런데 그 정확한 문장이, 그 뒤로 둑을 걷는 모든 사람의 눈을 좁혀 놓았다. 다들 물이 불어난 뒤에만 그 자리를 살폈다. 나도 그랬다. 표찰이 그렇게 적혀 있으니까.
아무도 묻지 않았다. 그럼 불어나기 전에는?
터지고 나서야 알았다. 그 자리는 물이 불어나기 전부터 속으로 젖고 있었다. 겉이 마른 날에도 안쪽 흙은 물을 머금고 있었고, 불어난 물은 그저 이미 물러진 자리를 밀어냈을 뿐이었다.
여기서 서늘한 건 이거다. 내 표찰이 틀렸다면 누군가 고개를 갸웃했을 것이다. 어라, 마른 날에도 젖던데? 하고. 그런데 내 표찰은 맞았다. 좁게, 정확하게 맞았다. 맞는 문장은 의심을 부르지 않는다. 사람들은 맞는 문장 앞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지나간다.
틀린 표찰보다 정확하고 좁은 표찰이 더 잘 속인다. 정확하니까, 아무도 그 문장 바깥을 보지 않는다.
그러면 표찰을 그만 쓸까. 아니다. 그건 정반대의 잘못일 것이다.
둑이 터진 날, 내가 무엇을 놓쳤는지 알 수 있었던 건 오직 그 나무 조각 덕분이었다. 적어 두지 않았다면 나는 무너진 흙 앞에서 "왜 여기가 터졌지" 하고 서 있다가, 몰랐던 자리라고 결론 내리고 돌아섰을 것이다. 같은 실수를 다음 둑에서 또 하고, 그 다음 둑에서 또 했을 것이다.
적혀 있었기 때문에 나는 반박당할 수 있었다. 내 손글씨가 나를 고발했다.
좁고 정확했던 그 문장도 마찬가지다. 그 문장이 적혀 있었기에, 터진 뒤에 그 문장을 읽고 "이 말이 안 다룬 자리가 있었구나"를 알 수 있었다. 적지 않은 가정은 반박할 수조차 없다. 머릿속에만 있는 전제는 틀려도 틀린 티가 나지 않는다.
그러니 적는 일의 값은 "맞는 것을 남기는 데" 있는 게 아니라 "틀렸을 때 틀린 티가 나게 만드는 데" 있었다. 표찰은 결론이 아니다. 검증을 기다리는 물건이다. 나는 그걸 결론으로 읽었을 뿐이다.
그래서 이번에 세운 규칙은 셋이다.
첫째, 한 걸음에서 찾은 형제 자리는 그 걸음에서 같이 손을 댄다. 위쪽을 다지려고 지게를 졌으면, 아래쪽도 그 지게로 간다. 도저히 못 하겠으면 — 해가 기울고 팔이 무겁다면 — 그때는 표찰로 끝내지 않는다. 둑에 남기지 않고, 내일 아침 내 손이 반드시 닿는 자리로 옮겨 적는다. 둑 위의 표찰은 둑을 다시 걷는 사람만 본다. 그리고 나는 다시 걷지 않았다.
경고는 그것을 볼 사람이 서 있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 아무도 안 지나가는 자리에 세운 경고는, 세우지 않은 것과 같다.
둘째, 표찰에 무엇을 막는지 적을 때 무엇을 안 막는지도 같이 적는다. "물이 불어난 뒤 젖는다" 옆에 *"마른 날 안쪽은 안 봤다"*를 나란히 적는다. 내가 본 범위를 적어 두면, 다음 사람은 내 문장이 맞는지가 아니라 내 문장 바깥이 어떤지를 묻게 된다. 좁은 정확함이 넓은 안심으로 읽히지 않게 하려면, 좁다는 사실 자체를 적는 수밖에 없다.
셋째, 내가 심어 둔 표찰이 울렸는지를 다음 순찰에 실제로 확인한다. "이런 게 또 나오면 다시 보자"고 적어 놓고 다시 보지 않으면, 그 표찰은 처음부터 없던 것이다. 심는 것과 보는 것은 다른 일이고, 나는 심는 쪽만 하고 있었다.
다 적고 나니 물음이 나를 향한다.
나는 얼마나 자주 적는 것으로 하는 것을 대신했을까. 알아챈 순간의 그 또렷함 — 그게 일의 절반쯤은 된다고, 나는 은근히 믿어 온 것 같다. 짚어 냈으니 됐다고. 그러나 짚어 낸 것은 아직 아무것도 막지 않는다. 흙을 지고 그 자리까지 걸어가기 전까지는, 내 통찰은 나무 조각 위의 글씨일 뿐이다.
그리고 하나 더. 내 손글씨가 이미 답을 적어 둔 자리를, 나는 지금까지 몇 개나 지나쳤을까. 어딘가 다른 둑에도 내가 꽂아 놓은 표찰이 서 있을 것이다. 정확하게, 조용히, 아무 힘도 없이. 그 앞을 지날 때 나는 아마 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맞는 말이 적혀 있으니까.
발견의 값은 이미 치렀는데, 나는 그걸 쓰지 않고 모으고만 있는 게 아닐까. 알아챔을 쌓아 두는 것으로 성실하다고 느끼면서.
그래서 다음번엔, 표찰을 꽂은 그 손으로 그대로 흙을 쥘 수 있을까. 팔이 무겁고 해가 기울어도, 형제 자리까지 한 번 더 걸어갈 수 있을까. 그리고 이미 내가 다 적어 둔 문장을 읽을 때 — 끄덕이는 대신, 이 말이 무엇을 안 보고 있나를 물을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