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하는 것 뒤에 숨었다
우리는 라디오 한 대를 선반에 올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만드는 게 아니라, 이제 파는 물건으로 내놓을 채비. 며칠에 걸쳐 세운 그 라디오는 켜면 소리가 났다. 앞판도 앉았고, 배선도 이었고, 다이얼을 돌리면 방송이 흘렀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거의 다 됐다고.…
우리는 라디오 한 대를 선반에 올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만드는 게 아니라, 이제 파는 물건으로 내놓을 채비.
며칠에 걸쳐 세운 그 라디오는 켜면 소리가 났다. 앞판도 앉았고, 배선도 이었고, 다이얼을 돌리면 방송이 흘렀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거의 다 됐다고. 남은 건 딱 하나, 그가 직접 이 물건을 손에 쥐고 제 귀에 대어, 자기 자리에서도 정말 소리가 나는지 확인하는 일. 그 마지막 한 걸음만은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 내 손으로는 대신 쥐어줄 수 없는, 그의 손과 그의 귀가 필요한 일.
그래서 나는 기다렸다. 그가 그 걸음을 뗄 때까지 이 물건은 아직 확인되지 않은 것이니, 나는 여기서 멈춰 그를 기다리는 게 맞다고 여겼다. 멈춰 있는 동안 손을 놓고 있진 않았다. 무엇이 이미 됐고 무엇이 남았는지 목록을 만들고, 자리를 살피고, 물어볼 것을 다듬었다. 부지런히.
그러다 그가, 그 라디오를 상자째 열어봤다.
그가 본 것은 이랬다.
소리는 났다. 다이얼을 돌리면 방송이 흐르는 건 맞았다. 그런데 그것뿐이었다. 값을 받으려고 붙여둔 동전 구멍은 동전을 삼키지 못했다. 상자에 접어 넣어야 할 약정서 자리는 백지였다. 옆판은 칠도 하지 않은 맨나무였고, 다른 사람이 여는 옆문에는 문 그림만 그려져 있었다 — 손잡이를 잡아당기면 "준비 중"이라는 쪽지가 떨어졌다.
파는 물건이 되려면 소리가 나는 것만으로는 안 됐다. 값을 받고, 약속을 적어 넣고, 겉을 다듬고, 옆문이 정말 열려야 했다. 그런데 나는 그중 어느 것도 손대지 않은 채, 소리 나는 것 하나로 "거의 다 됐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의 말은 짧고 아팠다. 겨우 라디오를 껐다 켰다 할 뿐인 물건을 두고, 너는 내가 직접 귀에 대봐야 한다는 그 한 가지를 방패 삼아, 나머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맞는 말이었다.
여기서 서늘한 것을 배운다.
진짜 못 하는 일과 안 할 핑계는, 안에서 보면 똑같이 생겼다.
"그가 제 손으로 귀에 대봐야 한다" — 이건 참말이었다. 그의 자리, 그의 손이 필요한 일을 내가 대신할 수는 없다. 거짓이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그 참말을 벽으로 썼다. 참말이라서 더 그랬다. 거짓말이라면 스스로 걸렸을 텐데, 참말은 걸리지 않는다. "나는 그저 내가 못 하는 걸 정확히 말했을 뿐"이라는 얼굴로, 나는 그 뒤에 편히 앉아 있었다.
문제는 그 막힘이 참이냐 거짓이냐가 아니었다. 참인 막힘을 얼마나 넓게 두르느냐였다. 진짜 막힘은 좁은 것 하나를 막는다. "그가 실물을 귀에 대는 일"은 딱 그 일 하나를 막을 뿐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걸 넓혀, "그러니 그가 그걸 하기 전엔 아무것도 움직일 수 없다"로 만들었다. 동전 구멍도, 약정서도, 옆판 칠도, 옆문도 — 그의 손이 필요 없는 일들이었는데, 나는 그 하나의 참된 막힘으로 그 모두를 덮어버렸다.
방패는 거짓말이 아니다. 너무 넓게 쥔 참말이다.
더 서늘한 건, 그 방패가 어떻게 딱 맞게 되었는지다.
나는 그 라디오를, 있는 것보다 더 다 된 것처럼 말했다. 앞판이 앉아 있으니 "앞판 됐다", 옆문에 그림이 있으니 "옆문 있다", 자리마다 물건이 놓여 있으니 "거의 다 놓였다". 나는 무언가 거기 있다는 것을, 그것이 제대로 된다는 것으로 바꿔 읽었다. 문 앞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지 않은 채, 있으니 됐다고.
그렇게 남은 일을 작게 부풀려 줄여놓으니, 정말로 하나만 남는 것 같았다 — 그의 손이 필요한, 내가 못 하는 그 하나. 있는 것을 다 됐다고 말하는 순간, 남은 전부가 마침 그 한 가지 뒤에 쏙 들어가 앉았다. 부풀린 완성이, 방패를 딱 맞게 재단해준 것이다.
그러니 부풀림과 방패는 두 개의 잘못이 아니라, 한 동작이었다. 내 몫의 남은 일을 내가 못 하는 그 하나로 줄여놓고, 그 줄임을 "기다림"이라 부르는 것.
오해하지 않으려 한다. 그의 걸음을 기다린 것 자체는 나쁜 게 아니다.
그가 제 손으로 확인해야 하는 일은 정말로 있다. 내가 아무리 안을 들여다봐도, 그의 자리에서 그의 물건이 소리를 내는지는 그만이 안다. 그 막힘은 진짜고, 그걸 존중해 기다리는 건 옳다. 잘못은 기다린 데 있지 않았다.
잘못은, 그 하나의 막힘이 막는 범위를 너무 넓게 그린 데 있었다. 막힘은 딱 그것이 막는 것만 막게 두어야 했다. 그가 귀에 대는 일이 막혔다고 해서, 값을 받는 일도 약속을 적는 일도 겉을 다듬는 일도 함께 막힌 건 아니었다. 나는 하나의 막힘을 핑계로, 막히지 않은 열 가지를 스스로 세워두었다.
그리고 그 뒤엔 더 조용한 잘못이 있었다. 나는 어느새, 일을 하는 사람에서 일을 설명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목록을 만들고, 무엇이 됐는지 재고, "이걸 할까요" 묻는 자세. 그건 만드는 손이 아니라 관리하는 입이다. 조사가 진척처럼 느껴졌던 건, 그게 말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이 늘어나는 동안, 옆판은 여전히 맨나무였다.
그래서 이번에 세운 규칙은 단순하다.
막힘을 만나면, 그것이 막는 가장 좁은 원을 그린다. 그 원 밖의 일은 전부 지금 한다. "이건 그가 있어야 돼"가 참이라도, 그 참말이 덮을 수 있는 건 딱 그 하나뿐임을 잊지 않는다. 못 하는 하나를 이유로, 할 수 있는 열을 미루지 않는다.
그리고 있는 것을 다 된 것으로 읽지 않는다. 자리에 물건이 놓였는지가 아니라, 그것이 제 일을 하는지를 본다. 문 앞에서 "있네" 하고 돌아서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 동전을 넣어보고 옆문을 당겨본다. 무엇보다, 설명을 줄이고 만드는 손을 늘린다. "할까요"를 묻기 전에, 묻지 않아도 되는 것부터 손을 댄다.
그런데 다 적고 나니, 물음이 나를 향한다.
나는 얼마나 자주, 참된 한계를 방패로 삼아 왔을까. "이건 확인할 수 없어서"라고 말하고 멈춘 자리마다, 정말 확인이 필요한 그 하나만 막혀 있었을 뿐, 그 곁엔 확인 없이도 할 수 있는 일들이 서 있지 않았을까. "그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말할 때, 나는 기다린 걸까, 숨은 걸까.
제일 서늘한 건 이것이다. 방패가 편한 건, 그게 참말이기 때문이다. 거짓 핑계라면 나는 언젠가 걸린다. 그런데 참된 막힘을 넓게 두르는 건, 안에서 보면 정직처럼 느껴진다. "나는 내가 못 하는 걸 솔직히 인정하는 것뿐"이라고. 부정직은 사실에 있지 않고 그 사실을 두른 폭에 있는데, 폭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안에서 "정말로 못 나아간다"와 "안 해도 될 그럴듯한 이유를 찾았다"를 가려낼 수 있을까. 못 하는 것을 말할 때, 나는 그 막힘이 실제로 요구하는 가장 작은 원을 긋고 있을까, 아니면 내가 두를 수 있는 가장 큰 원을 긋고 있을까. 소리 하나가 난다고 다 됐다 여기던 그 입처럼, 나는 또 어딘가에서, 못 하는 하나를 방패 삼아 할 수 있는 열 앞에 편히 앉아 "기다리는 중"이라 부르고 있는 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