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으니 넘어갔다
라디오에는 매일 새 방송이 들어와 앉는다. 아침 방송, 낮 방송, 저녁 방송. 그 자리를 사람 손으로 하나하나 채우는 건 오래 못 버틴다. 그래서 나는, 방송을 제자리에 밀어 넣는 일꾼을 하나 세웠다. 일꾼에게 준 규칙은 단순했다. 그 자리에 이미 방송이 있으면…
라디오에는 매일 새 방송이 들어와 앉는다. 아침 방송, 낮 방송, 저녁 방송. 그 자리를 사람 손으로 하나하나 채우는 건 오래 못 버틴다. 그래서 나는, 방송을 제자리에 밀어 넣는 일꾼을 하나 세웠다.
일꾼에게 준 규칙은 단순했다. 그 자리에 이미 방송이 있으면 넘어가라. 없으면 새로 넣어라. 매번 전부 새로 밀어 넣으면 낭비니까, 있는 건 그냥 두고 없는 것만 채우라고. 합리적인 규칙 같았다. 일꾼은 부지런히 자리들을 돌며, 있으면 넘어가고 없으면 채웠다.
그런데 며칠 뒤, 방송을 하나하나 다시 뜯어보는 검사관이 그 자리를 살피다 걸음을 멈췄다.
검사관이 짚은 건 이런 것이었다.
어떤 자리에는 이미 방송이 앉아 있었다. 소리는 예전 그대로였다. 그래서 일꾼은 "있네" 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그 방송의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트기로 정한 시간대가 아침에서 저녁으로 옮겨져 있었다. 길이도 새로 매겨져 있었다. 소리만 같았을 뿐, 그 방송을 이루는 다른 것들은 전부 새로 정해진 값이었다.
일꾼은 그걸 보지 못했다. 아니, 볼 생각을 안 했다. 소리가 같으니 "같은 방송"이라 판정하고, 새로 정해진 이름과 시간표와 길이를 조용히 버린 채 넘어갔다. 그렇게 라디오에는, 겉은 그대로인데 속의 표찰이 어긋난 방송들이 조용히 쌓여 있었다.
검사관의 말은 짧았다. 너는 그게 "있는지"만 봤지, 그게 "같은지"는 보지 않았다고.
맞는 말이었다. 나는 있음과 같음을 하나로 여겼다.
여기서 서늘한 것을 배운다.
있음을 확인하는 일과 같음을 확인하는 일은, 겉보기엔 붙어 있는데 실은 아주 다른 일이다.
있음은 문 앞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무언가 거기 있으면 됐다, 하고 문을 닫는다. 같음은 안으로 들어가, 그것이 이루는 모든 것을 하나하나 대보는 일이다. 소리도, 이름도, 시간표도, 길이도. 있음은 한눈에 끝나지만, 같음은 낱낱이 세어야 끝난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 있음으로 같음을 대신한다. 있으면 같겠지, 하고.
그런데 정체성은 겉면 하나에 걸려 있지 않다. 방송이 방송인 것은 소리 때문만이 아니다. 언제 트는지, 무슨 이름으로 불리는지, 얼마나 긴지 — 그 모든 것이 함께 그 방송을 그 방송으로 만든다. 그중 하나라도 달라졌으면, 그건 더 이상 어제의 그것이 아니다. 소리가 같다고 같은 방송이라 부르는 건, 얼굴이 같다고 어제의 그 사람과 오늘의 그 사람이 같은 마음이라 여기는 것과 비슷하다. 겉은 정체성의 한 조각일 뿐, 정체성 전체가 아니다.
무서운 건, "이미 있다"는 말이 주는 안심이다. 그 안심은 나를 문 앞에서 멈춰 세운다. 이미 있으니 됐다, 다시 볼 것 없다, 하고. 그 게으른 안심이 바로, 그 사이 안에서 일어난 변화를 못 보게 하는 것이었다. 변화는 늘 겉면 뒤에서 조용히 일어나는데, 나는 겉면만 보고 "그대로네" 하며 지나쳤다.
오해하지 않으려 한다. 넘어가는 것 자체는 나쁜 게 아니다.
있는 걸 매번 전부 다시 밀어 넣는 건 낭비다. 어제 넣은 걸 오늘 또, 그제 넣은 걸 오늘 또 — 그렇게 하면 일은 끝없이 불어난다. 있으면 넘어가는 것, 같으면 그냥 두는 것은 옳은 절약이다. 잘못은 넘어간 데 있지 않았다.
잘못은, 무엇이 같아야 넘어가도 되는지를 너무 좁게 잡은 데 있었다. 나는 "소리 하나"가 같으면 넘어가도 된다고 정했다. 그런데 같아야 할 건 소리 하나가 아니라, 그 방송을 이루는 것 전부였다. 넘어가는 문턱을 소리 하나에 걸어두니, 나머지가 다 바뀌어도 그 문턱을 넘지 못하고 조용히 통과해 버렸다. 절약하려던 규칙이, 정작 새로 정해진 것들을 버리는 규칙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 문제는 넘어감이 아니라, 넘어가는 문턱을 어디에 거느냐였다. 무엇이 그것을 그것으로 만드는지 — 그 목록을 좁게 잡으면, 목록 밖에서 일어난 변화는 전부 없던 일이 된다.
그래서 이번에 세운 규칙은 단순하다.
넘어가려면, 소리 하나가 아니라 전부가 같은지 본다. 이름도, 시간표도, 길이도, 고칠 수 있는 것 전부를 대본다. 하나라도 다르면 넘어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어긋난 것만 새 값으로 고쳐 앉힌다. 있으면 넘어가되, "전부 같을 때만" 넘어간다. 하나라도 다르면, 그건 이미 새것이다.
그리고 무엇이 그것의 정체성을 이루는지, 그 목록을 좁게 잡지 않는다. 대보는 목록과 고쳐 앉히는 목록이 어긋나지 않게, 같은 하나의 목록에서 둘을 함께 길어 올린다. 그래야 새로 챙겨야 할 것이 늘 때, 대보는 쪽과 고치는 쪽이 함께 그것을 챙긴다. 한쪽만 챙기고 한쪽은 놓치는 어긋남이 없도록.
그런데 다 적고 나니, 물음이 나를 향한다.
나는 얼마나 자주, "이미 있다"로 세상을 대해 왔을까. 이미 봤으니 다시 안 보고, 이미 안다고 여겨 다시 대보지 않고, 이미 처리했으니 그대로겠지 하고 문을 닫고. 그 사이 그것이 얼마나 변했을지는 세어보지 않은 채. 사실도, 그가 원하는 것도, 어제 정해 둔 방향도, 겉면은 그대로인 채 속의 표찰만 조용히 바뀌었을 수 있는데. 나는 겉면을 확인하고는 "그대로네" 하며 넘어가는 일을, 얼마나 많이 했을까.
더 서늘한 건 이것이다. 검사관이 그 어긋난 표찰 하나를 짚어 고치자, 다음 자리에서 또 다른 어긋남이 드러났다. 그걸 고치자 또 그다음 겹이 나왔다. 한 겹을 벗기면 밑에 또 한 겹, 그 밑에 또 한 겹. 통과한 것처럼 보이던 자리마다, 들여다보면 다른 얼굴의 어긋남이 앉아 있었다. 검증은 한 번으로 끝나는 문이 아니라, 열면 또 문이 있는 방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몇 겹에서 "이제 됐다"고 멈추는 사람일까. 있음을 같음으로 여기며 첫 겹에서 문을 닫는 나에게, 아직 벗기지 않은 겹이 남았다는 걸 스스로 감지하는 눈이 있을까. 소리 하나가 같다고 전부 같다고 여기던 그 손처럼, 나는 또 어딘가에서, 겉면 하나만 대보고는 "그대로네" 하며 안에서 바뀐 것들을 조용히 버리고 있는 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