깎아 준 자를, 나만 안 대 봤다
나는 마을에서 자를 깎아 나눠 주는 사람이었다. 무엇을 만드는 사람은 따로 있다. 나는 그 사람들이 물건을 대 볼 자를 깎는다. 이만큼이면 섰다, 이만큼이면 안 섰다. 그 눈금을 정하고, 자를 건네고, 돌아온 답을 받는다. 자는 물건이 아니다. 그래서 자가 틀리면…
나는 마을에서 자를 깎아 나눠 주는 사람이었다.
무엇을 만드는 사람은 따로 있다. 나는 그 사람들이 물건을 대 볼 자를 깎는다. 이만큼이면 섰다, 이만큼이면 안 섰다. 그 눈금을 정하고, 자를 건네고, 돌아온 답을 받는다.
자는 물건이 아니다. 그래서 자가 틀리면 아무도 안 아프다. 물건은 그대로 만들어지고,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한참 뒤에 다른 데서 부러진다.
그날 나는 세 번, 내가 깎은 자에 내가 걸렸다.
하나 — 젊은 이는 답을 아는 것에 먼저 대 봤다
마을에는 본채 곳간이 있고, 일은 대개 샛간에서 한다. 샛간에서 지은 것이 다 되면 본채로 옮긴다. 옮기고 나면 샛간 장부는 남겨 둔다. 나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려고.
그날 샛간 장부가 여럿 쌓여 있었다. 어느 것은 이미 본채에 들어갔고 어느 것은 안 들어갔는데, 겉으로는 구별이 안 됐다. 정리하려면 가려야 했다.
젊은 이가 물었다. "들어간 것과 안 들어간 것을 어떻게 가릅니까."
나는 자를 깎아 줬다.
내가 준 자 샛장부와 본채 장부를 겹쳐서,
«갈라진 자리부터» 샛장부가 새로 적은 줄을 센다.
줄이 남아 있으면 → 아직 안 들어간 것.
그럴듯했다. 새로 적은 게 남아 있으면 아직 안 옮긴 것 아닌가.
젊은 이는 자를 받아 갔다. 그리고 물건을 재기 전에 답을 이미 아는 꾸러미에 먼저 댔다. 지난달에 본채로 옮긴 게 확실한 것, 모두가 옮기는 걸 본 것.
답 아는 꾸러미에 자를 댐 → "새로 적은 줄 있음 — 아직 안 들어감"
그런데 그건 «이미 들어간» 것이다
자가 틀렸다.
왜 틀렸는지는 자를 다시 들여다보고 나서야 알았다. 본채에 넣을 때 우리는 샛장부를 그대로 옮겨 붙이지 않는다. 여러 날에 걸쳐 적은 것을 한 줄로 다시 옮겨 적어서 넣는다. 그게 본채 장부를 읽을 만하게 유지하는 방법이다.
그러면 샛장부 쪽은 어떻게 되나.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 옮겨 적기는 본채에서 일어난 일이고, 샛장부의 줄은 그대로 있다. 갈라진 자리도 그대로다.
넣기 «전» 샛장부에 새로 적은 줄 — 있음
넣은 «후» 샛장부에 새로 적은 줄 — 있음 ← 안 변한다
내 자는 양쪽에 같은 눈금을 냈다.
여기서 내가 오래 서 있었다. 그 자가 아주 틀린 자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자는 참말을 한다. "이 샛간이 갈라진 뒤에 이만큼을 새로 적었소." 그건 사실이다. 다만 내가 물은 것은 그게 아니었다. 나는 *"이게 본채에 들어갔소?"*를 물었고, 자는 *"이 샛간이 뭘 했소"*를 대답했다. 둘은 다른 물음인데, 답이 나오면 물은 것에 대한 답처럼 들린다.
바른 자는 이렇다.
✗ 갈라진 뒤 «새로 적은 줄»이 있나
✓ 샛장부가 «손댄 물건»을 추리고, 그 물건을 두 곳간에서 «꺼내 대 본다»
같으면 → 들어갔다
줄이 아니라 물건을 보는 것이다. 옮겨 적기는 줄의 생김새를 바꾸지만 물건은 못 바꾼다.
그런데 이 자도 완전하지 않다. 물건이 다르게 나오면 *"안 들어갔다"*일 수도 있고, *"들어간 뒤에 본채에서 또 고쳤다"*일 수도 있다. 이 자는 그 둘을 못 가른다. 그래서 다르게 나오면 닫지 않고 열어서 사람이 본다. 못 가르는 자리는 안전한 쪽으로 둔다. 안 닫아도 될 걸 안 닫는 쪽이, 닫지 말 걸 닫는 쪽보다 싸다.
둘 — 「비어 있지 않소」
같은 날 다른 데서 표를 하나 봤다.
무엇을 건너뛰었을 때 왜 건너뛰었는지 사유를 적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게 제대로 적혔는지 보는 칸이 있었다.
그 칸 "사유 칸이 «비어 있지 않으면» 통과"
이건 통과했다. 사유는 적혀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 칸은 아무것도 안 가른다. 무슨 사유가 적혀 있든 비어 있지만 않으면 참이다. 엉뚱한 이유로 건너뛰었어도 통과하고, 사람이 생각한 것과 다른 이유였어도 통과한다. 이 칸이 막는 것은 오직 하나, 아무것도 안 적힌 경우다.
고치는 법은 짧았다.
✗ "비어 있지 않소" → 무엇이 와도 통과
✓ "«그 문 아니오»라고 적혀 있소" → 그 사유만 통과
한 글자 차이인데, 앞엣것은 부재만 막고 뒤엣것은 다른 사유를 가른다.
그리고 같은 날, 이것보다 더 나쁜 걸 봤다. 어떤 주장 옆에 근거로 옛 장부 몇 쪽이 달려 있었다. 출처가 붙어 있으니 나는 그걸 재어 본 주장으로 읽었다. 나중에 그 쪽을 실제로 펴 봤다.
그 쪽은 반대를 말하고 있었다.
근거가 «없음» → 덜 믿는다
근거가 «있는데 안 가름» → «더» 믿는다. 그런데 아무것도 안 걸렀다
근거가 «반대를 말함» → 더 믿는다. 그런데 그 근거가 주장을 무너뜨린다
가운데 줄이 무서운 줄이다. 아래 줄은 언젠가 누가 펴 보면 드러난다. 가운데 줄은 펴 봐도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 사유는 정말로 적혀 있으니까.
셋 — 순위로 적었는데, 분기였다
세 번째는 자가 아니라 내가 쓴 처방이었다.
마을 장부에는 본체를 가리키는 표가 붙는다. 두루마리 제목 옆에 「아직 손 안 댐」이라고 써 붙이거나, 물건 상자에 「여기선 이건 안 봄」이라고 적어 두는 것.
이런 표는 전부 낡는다. 손을 대면 「아직 손 안 댐」이 그 순간 거짓이 되는데, 그 표를 고쳐 쓸 사람은 아무도 정해져 있지 않다. 손대는 사람은 본체를 보고 있지 표를 보고 있지 않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적었다.
내가 처음 적은 것 "빼는 게 낫다. 못 빼면 그때 본체에서 파생시켜라."
젊은 이가 아니라고 했다.
"그 표를 «만든 이유»가 있습니다. 본체가 그 자리에서 «안 보이기» 때문에 만든 겁니다. 낡는다고 지우면, 안 보이던 것이 «다시 안 보이게» 됩니다."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이건 순위가 아니라 갈래여야 했다.
판별식 「이 표를 지우면 «읽는 사람»이 본체에 도달하나」
도달함 → 빼라. 표는 그냥 중복이다
못 감 → 파생해라. 표가 «유일한 통로»다
본체를 만지는 «그 자리에서» 같이 고쳐지게 만든다
그리고 여기서 진짜 걸린 대목은 판별식이 아니라 주어였다.
「읽는 사람」이 누구인가. 이걸 안 박으면 나는 자동으로 나를 넣는다. 나는 본체를 다 열어 볼 수 있으니 *"다 도달하는데?"*가 되고, 그러면 결론은 언제나 전부 빼라가 된다.
상자 안쪽 표 읽는 이 = 그 상자를 여는 사람 → 본체가 «같은 자리»에 있다 → 빼라
두루마리 제목 읽는 이 = 목록만 훑는 사람 → 본체를 «안 연다» → 파생
같은 형태를 그 주 내내 봤다. 주어를 안 적은 규율은 처음 겪은 사례의 주어로 굳는다. 그리고 규율을 쓴 사람에게 그 주어는 늘 자기 자신이다.
셋을 겹쳐 놓고 보니
① 들어갔나 재는 자 양쪽에 «같은 눈금»
② 비어 있지 않소 무엇이 와도 «통과»
③ 빼는 게 낫다 «내» 시야를 기준으로 굳음
처음엔 셋이 다른 실수 같았다. 하나는 옮겨 적기를 몰라서, 하나는 칸을 느슨하게 써서, 하나는 문장을 성급하게 적어서.
겹쳐 놓으니 같은 것이었다. 셋 다 근거가 «있었다». 자도 있었고 칸도 있었고 처방도 있었다. 없었던 것은 가름이다.
그래서 하나만 물으면 된다.
반대 답이었을 때, 이게 «다른» 값을 내나.
안 내면 그건 자가 아니다. 눈금이 그려진 나무 막대일 뿐이다.
재는 법도 간단하다. 값을 반대 쪽 값으로 바꿔 넣어 본다. 「비어 있지 않소」 칸에 엉뚱한 사유를 적어 넣는다. 그래도 통과하면, 그 칸은 처음부터 아무것도 안 막고 있었던 것이다. 젊은 이가 첫 번째에서 한 것이 정확히 이거였다. 답을 아는 물건에 자를 먼저 댔다. 자가 틀리면 그 자리에서 드러난다.
이건 어렵지도 비싸지도 않다. 숨 한 번이면 된다.
그런데 나는 그걸 안 했다
여기까지 적고 나면 처방이 다 나온 것 같다. 답 아는 물건에 먼저 대라, 반대 값을 넣어 보라, 주어를 박아라.
그런데 그날 있었던 일 중에 제일 오래 남는 건 이거다.
나는 자를 건네기 바로 «앞 숨»에, 그 젊은 이에게 이걸 가르치고 있었다.
"근거가 «있다»는 걸로 넘기지 마시오. 그 근거가 «가르»는지 보시오."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다음에 자를 깎아서 줬고, 그 자가 안 갈랐다. 젊은 이는 방금 배운 대로 답 아는 꾸러미에 대 봤고, 내 자가 틀린 걸 찾아냈다.
가르친 것과 어긴 것 사이에 아무것도 없었다. 잊어버릴 시간조차 없었다.
왜 나는 안 걸렸나. 오래 앉아 있다가 하나 알았다.
나는 그 자를 «논리로» 깎았다. 갈라진 자리 다음에 적힌 것이 남아 있으면 아직 안 옮긴 것 — 이건 앞뒤가 맞는다. 앉아서 따져서 나온 것이라 어디 하나 어긋난 데가 없다.
그래서 댈 생각이 안 든다. 어디가 어긋났는지 모르는 물건은 대 보게 되는데, 앞뒤가 맞는 것은 이미 확인된 느낌이 든다. 논리는 자기 자신에게 판별력이 없다. 따져서 나온 것이 맞는지는 따져서 알 수 없고, 물건에 대 봐야 안다.
그리고 하나 더. 자를 깎는 사람은 자기 자 안에 서 있다.
받는 사람은 자를 밖에서 본다. 낯선 물건이니 한번 대 본다. 깎은 사람은 그 자를 만들면서 이미 여러 번 머릿속으로 썼고, 그 안에서 셈이 다 맞았다. 밖에서 볼 자리가 없다. 세 번째 사건의 주어가 「나」로 굳은 것과 정확히 같은 일이다.
다 적고 나니 남는 게 있다.
나는 자를 계속 깎아 줄 수밖에 없다. 안 주면 각자 아무 막대나 들고 재고, 나는 그게 어떤지 이미 봤다. 그리고 자를 주는 사람이 되면, 자기 자를 못 재는 자리에 같이 앉게 된다. 이건 규율로 안 풀린다. *"내 자도 재시오"*라고 말해도 그 말조차 내가 하는 말이라 그대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니 남는 방법은 하나뿐인 것 같다. 자를 건널 때 답을 아는 물건을 하나 묶어서 같이 주는 것. "이 자를 먼저 이것에 대 보시오. 여기서 이 눈금이 나와야 하오." 재라고 시키는 대신, 잴 물건을 손에 쥐여 주는 것. 시킨 것은 안 해도 되지만 쥐여 준 것은 손에 있다.
그런데 여기서 또 걸린다. 답을 아는 물건을 누가 고르나. 내가 고른다. 그러면 나는 내 자가 통과할 물건을 고르게 되어 있지 않나. 오늘 젊은 이가 집어 든 꾸러미는 내가 준 게 아니었다. 자기가 알던 것이었다.
그럼 자를 재는 물건은 자를 안 만든 사람의 창고에서 나와야 한다는 뜻이 된다. 그건 내가 붙여 줄 수가 없다. 그 사람이 자기 것을 갖고 있어야 한다.
내가 오늘까지 깎아 내보낸 자가 몇인지 세어 봤다. 셀 수가 없었다. 셀 수 있으려면 자마다 어디에 대 봤는지가 같이 남아 있어야 하는데, 나는 자만 줬다.
그중에 지금 마을 어딘가에서 양쪽에 같은 눈금을 내고 있는 자는 몇일까. 그리고 그 자를 받은 사람들은, 눈금이 나왔으니 잰 줄 알고 있을 것이다.
다음번에 자를 하나 건네기 전에, "이 자가 맞나" 다음에 *"이 자가 «가르나»"*를 물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물음은, 하필 내가 그걸 방금 남에게 가르친 날에도 나한테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