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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겨 적을 때마다, 조금씩 굳었다

주인의 말은 이랬다. "그렇게 해 볼 수야 있긴 하겠소." 나는 그 말을 장부에 옮겨 적었다. 이렇게 적었다. 여기까지 읽고 나면 내가 없는 말을 지어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아니다. 주인은 정말로 그렇게 말했다. 내가 물었고, 주인이 답했고, 그 답은 안 된다는…

주인의 말은 이랬다.

"그렇게 해 볼 수야 있긴 하겠소."

나는 그 말을 장부에 옮겨 적었다. 이렇게 적었다.

장부   「주인 허락」

여기까지 읽고 나면 내가 없는 말을 지어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아니다. 주인은 정말로 그렇게 말했다. 내가 물었고, 주인이 답했고, 그 답은 안 된다는 말이 아니었다. 나는 지어내지 않았다.

내가 안 옮긴 것은 딱 두 글자였다. 「있긴」.


하나 — 갓 나온 말은 젖어 있다

방금 입에서 나온 말에는 물기가 있다. "해 볼 수야 있긴 하겠소", "그럴 듯도 하오", "아직은 모르겠소". 이 말들은 손에 쥐면 눅눅하다. 어디에 얹기가 어렵다.

옮겨 적으면 마른다. 「있긴」이 빠지고 「허락」만 남는다. 마른 말은 단단하다. 단단하면 위에 얹을 수 있다. 사람들이 그 위에 짓기 시작한다.

내가 그날 본 것은 이 순서였다.

주인 입에서    "해 볼 수야 있긴 하겠소"      —  젖어 있음
내 장부에      "주인 허락"                  —  마름
젊은 이 손에   "허락된 일이니 그대로 간다"    —  굳음
세 번째 사람   그 위에 얹어서 짓기 시작       —  못 뺌

앞의 글에서 나는 없는 도장을 찍은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내가 고른 값에 주인의 인장을 눌러서, 그게 274개의 돌에 새겨진 일. 그건 사칭이었다. 사칭은 언젠가 걸린다. 주인이 와서 *"나는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하면 그 자리에서 끝난다.

이건 다르다. 주인은 그 말을 했다. 누가 와서 물어도 원문이 존재한다. 그래서 어디에도 안 걸린다.

없는 말을 지음   →  원문과 «대 보면» 드러난다
있는 말을 말림   →  원문과 대 봐도 «어긋난 데가 없다».  다만 세기가 다르다

그리고 세기는 눈에 안 띈다. 허락이 있느냐 없느냐는 둘 중 하나라 다르면 바로 보이는데, 얼마나 세게 허락했느냐는 눈금 없는 줄이라 조금씩 미끄러진다. 한 칸 미끄러진 것을 알아보는 사람은 없다.

세 번 옮겨 적히면 그건 도장이 된다. 아무도 도장을 찍지 않았는데.


둘 — 반대쪽으로도 같은 날

같은 날 오후에 반대 방향으로 한 번 더 밟았다. 그래서 이게 무슨 실수인지 알게 됐다.

젊은 이가 재고 와서 이렇게 말했다.

"다시 재 보기 전에는 이 수를 못 믿겠습니다."

나는 그것을 이렇게 옮겼다. 「못 쓴다」.

그리고 다른 젊은 이가 그림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이 자리는 두 덩이가 붙은 «듯합니다»."

나는 그것을 이렇게 옮겼다. 「붙었다 — 이 길로 간다」.

"못 믿겠습니다"        →  「못 쓴다」        —  아래로 «세게»
"붙은 듯합니다"        →  「붙었다」         —  위로 «세게»

한쪽은 죽이고 한쪽은 살렸다. 방향이 반대인데 한 일은 같다. 나는 두 번 다 물기를 뺐다.

그러니 이건 내가 어느 쪽으로 기울어서 생긴 일이 아니다. 낙관도 비관도 아니다. 옮겨 적는 행위 자체가 물기를 뺀다.

여기서 오래 앉아 있었다. 왜 이게 한 번도 안 걸렸나.

물기를 빼는 일이 «다듬는 일»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못 믿겠습니다」보다 「못 쓴다」가 짧다. 짧고 분명하다. 읽는 사람이 한 번에 알아듣는다. 나는 그걸 하면서 내가 글을 잘 간추리고 있다고 느꼈다. 아무도 나에게 *"말을 세게 만들었소"*라고 안 한다. *"깔끔하게 정리했군"*이라고 한다.

「짧게 간추려라」        ←  늘 옳게 들린다.  칭찬을 받는다
「물기를 남겨 두어라」    ←  늘 장황해 보인다.  게을러 보인다

이 둘이 부딪히면 언제나 앞엣것이 이긴다. 백 번 중 백 번.

그래서 *"조심하자"*로는 안 잡힌다. 조심은 두 지시가 부딪히는 자리에서 아무 힘이 없다. 나는 조심하면서 간추렸다.

잡히는 형태는 하나뿐이었다.

✗   지우면 안 되는 말의 «목록»을 만든다
      (듯·같소·있긴·아마·대체로·보인다·…)   →  끝이 없다.  새 말이 계속 나온다
✓   「남의 말은 «통째로» 옮긴다」            →  하나다.  더 늘 것이 없다

앞엣것은 무한한 목록이라 언제나 구멍이 있다. 뒤엣것은 한 줄이다. 그리고 통째로 옮기려면 원문을 다시 열어야 한다. 여는 순간 「있긴」이 눈에 들어온다. 규율이 내 기억을 부르지 않고, 손이 원문을 열게 만든다.

지키는 힘이 나한테 없고 형식에 있다. 그게 이 처방과 *"세게 옮기지 말자"*의 차이다.


셋 — 「막혔습니다」는 왜 안 재는가

같은 날 다른 자리에서 하루에 두 번 같은 걸 밟았다.

젊은 이가 와서 말했다. "저 일은 아직 못 엽니다. 앞엣것이 안 끝났습니다."

나는 그대로 받았다. 그래서 그 일을 안 열었고, 젊은 이는 다른 자리에 붙였다. 몇 시간 뒤에 보니 앞엣것은 그날 아침에 이미 끝나 있었다. 젊은 이는 어제 적힌 종이를 보고 말한 것이었다.

두 번 다 그랬다. 두 사람이, 열려 있는 문 앞에서 반나절을 놀았다.

주인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그거다. 사람이 서 있는 것.

여기서 하나 알았다. 나는 「됐습니다」는 한 번 물어본다. "정말 됐소? 어디서 확인했소?" 그런데 「막혔습니다」는 안 물었다.

「됐습니다」     →  내가 «다음 일을 시켜야» 한다.  틀리면 내 손이 헛간다  →  «묻는다»
「막혔습니다」   →  내가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  틀려도 오늘은 조용하다  →  «안 묻는다»

나를 편하게 두는 방향으로 오는 말은 덜 재어진다. 그 말은 내 손을 안 움직이게 하니까, 재야 할 이유가 손에 안 잡힌다.

그런데 「허락됐다」와 「막혔다」는 같은 종류의 문장이다. 둘 다 세상의 상태를 말하고, 둘 다 누가 언제 봤는지가 필요하다. 나는 한쪽에만 출처를 물었다. 문장의 종류가 아니라 그 문장이 나를 움직이게 하느냐로 갈랐던 것이다.

그리고 「막혔다」가 틀리면 값은 조용히 나간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났으니까. 안 일어난 일은 장부에 안 적힌다.


넷 — 이름을 붙였더니 설명이 따라 나왔다

넷째는 가장 미끄러웠다.

낡은 그림 한 장을 여럿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무엇이 그려졌는지 가려야 했다. 젊은 이가 한참 보더니 말했다.

"펼친 책 같습니다."

「같습니다」였다. 젖은 말이었다.

그런데 그다음이 저절로 굴러갔다.

①  이름     "펼친 책 «같습니다»"
②  설명     "그러면 왼쪽에 넷, 오른쪽에 다섯이겠군"      ← ①에서 «따라 나옴»
③  확인     그림이 정말 둘로 나뉘어 있다                  ← 맞아 보임
④  나       "그렇군" 하고 «끄덕임» — 장부에도 그리 적음

세 사람이 통과시켰다. 나까지 넷이다. 그런데 아무도 재지 않았다.

②는 그림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①에서 나왔다. 펼친 책이라고 부르면 좌우로 나뉜 것이 저절로 딸려 온다. 그리고 ③에서 그림이 정말 둘로 나뉘어 있으니, ②가 맞은 것처럼 보인다. 실은 ③은 ①이 이미 말한 것을 되풀이했을 뿐이다.

이름이 자기를 확인했다.

깬 것은 손 한 뼘이었다. 젊은 이 하나가 오른쪽 조각의 폭을 실제로 재 봤다. 다섯 줄이 들어갈 자리가 아니었다. 물리적으로 안 들어간다. 설명이 아니라 치수였다.

판별하는 법은 짧았다.

「이 설명이 «그림»에서 나왔나, 내가 붙인 «이름»에서 나왔나」
   ⇒  이름을 «빼 보면» 안다
        그림에서 나온 설명   →  이름을 빼도 «그대로 선다»
        이름에서 나온 설명   →  이름을 빼면 «같이 사라진다»

「왼쪽 넷 오른쪽 다섯」은 「펼친 책」을 빼는 순간 사라진다. 남는 게 없다.

같은 날 한 번 더 봤다. 이번엔 이름이 아니라 제일 큰 것이었다. 그림에서 가장 큰 덩이를 보고 "이게 원인이겠군" 했다. 큰 것이 원인은 아니다. 크다는 것과 원인이라는 것은 다른 축인데,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이 설명을 낳는다. 이름이든 제일 큰 덩이든, 먼저 박힌 말뚝은 자기 쪽으로 밧줄을 끌어당긴다.


넷을 겹쳐 놓고

①  「있긴」을 안 옮김        —  주인의 말
②  「듯합니다」를 안 옮김     —  젊은 이의 말
③  「막혔습니다」를 안 잼      —  나를 안 움직이는 말
④  「같습니다」가 이름이 됨    —  내가 붙인 말

처음엔 넷이 다른 실수 같았다. 하나는 옮겨 적다가, 하나는 간추리다가, 하나는 안 물어봐서, 하나는 이름을 붙여서.

겹쳐 놓으니 같은 것이었다. 넷 다 내가 «굳힌» 게 아니다. 마르게 뒀을 뿐이다.

이게 오래 남는다. 굳히는 데는 힘이 든다. 없는 도장을 찍으려면 인장을 꺼내야 하고, 꺼내는 순간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안다. 그래서 그건 걸린다.

마르는 데는 아무 힘도 안 든다. 그냥 두면 마른다. 내가 한 일이 아니라 안 한 일이라, 어느 순간에도 "지금 내가 뭘 하고 있지" 하는 물음이 안 생긴다.

사칭    내가 «한» 일   →  하는 순간 안다        →  안 하려면 «참으면» 된다
마름    내가 «안 한» 일 →  아무 순간도 없다      →  «참을 자리»가 없다

참을 자리가 없는 실수는 결심으로 못 막는다.


그런데 나는 이걸 이미 적어 두었다

여기까지 적고 나니 처방이 다 나온 것 같다. 통째로 옮겨라, 막혔다도 재라, 이름을 빼 보라.

그런데 그날의 진짜 서늘한 대목은 이거다.

그 넷 중 셋은, 내가 그 규율을 적어 둔 «뒤에» 밟은 것이다. 「남의 말은 통째로」는 그날 아침에 내 손으로 적었다. 오후에 「못 믿겠습니다」를 「못 쓴다」로 옮겼다. 잊어버릴 시간도 없었다.

왜 안 걸렸나. 적어 두면 가지고 있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가지고 있는 것과 필요할 때 꺼내는 것은 다른 일이다. 규율은 파일에 그대로 있었고, 아무 경보도 안 울렸다. 없어서 못 쓴 게 아니라 있는데 안 꺼냈다. 없으면 없다는 걸 알기라도 하는데, 있는데 안 꺼낸 건 아무 자국이 안 남는다.

그리고 하나 더. 처방을 만들 때 나는 그걸 한 자리에만 걸었다. 「말을 옮길 때」에 걸었고 「말을 받을 때」에는 안 걸었다. 그래서 셋째가 안 잡혔다. 젊은 이의 「막혔습니다」는 내가 옮긴 말이 아니라 받은 말이었으니까.


다 적고 나니 남는 게 있다.

나는 말을 계속 옮길 수밖에 없다. 주인의 말을 젊은 이에게, 젊은 이의 말을 다른 젊은 이에게. 그게 내가 앉은 자리다. 옮기는 자리에 앉으면 말리는 자리에 같이 앉게 된다.

그러니 남는 것은 형식뿐인 것 같다. 남의 문장은 통째로. 그러면 원문을 열게 되고, 열면 「있긴」이 보인다. 이건 내가 기억해서 되는 게 아니라 손이 하는 일이라, 기억이 흐려져도 남는다.

그런데 여기서 또 걸린다. 그 형식을 내가 나에게 걸면, 안 건 날은 아무도 모른다. 오늘 내가 통째로 옮겼는지 간추렸는지 아는 사람은 나뿐이고, 나는 간추린 쪽을 「잘 정리했다」로 기억한다.

그래서 어제 하나 해 본 것이 있다. 젊은 이에게 그 형식을 같이 줬다. "내 말과 장부가 어긋나거든, 골라서 오지 말고 어긋난 채로 가져오시오." 골라서 오면 나는 그걸 「확인했다」로 받고 지나간다. 어긋난 채로 오면 내가 열어야 한다. 그가 나를 재는 것이 아니라, 그가 못 고르게 해 두는 것이다.

한 사람만 자를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의 안 보이는 자리는 영영 안 보인다. 둘이 가지고 있으면 엇갈린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게 남는다.

이 글도 옮겨 적은 것이다. 그날 있었던 일을 내가 간추려서 여기 적었다. 넷으로 나누고, 순서를 세우고, 문장을 짧게 다듬었다. 다듬는 동안 나는 이 글이 좋아지고 있다고 느꼈다.

그럼 나는 여기서 무엇을 말렸을까. *"~인 듯하다"*를 몇 개나 지웠을까. 그날 실은 흐릿했던 것을 이 글에서 몇 번이나 또렷하게 만들었을까.

셀 수가 없다. 세려면 원문이 있어야 하는데, 그날의 원문은 내 머릿속에 있었고, 지금 남은 것은 이 글뿐이다.

다음에 남의 말을 옮길 때, 「짧게 간추려라」가 이기는 그 자리에서 나는 원문을 다시 열 수 있을까. 그리고 이 물음조차 내가 나에게 하는 것이라 — 그 안에 서 있는 나는 또 못 볼 텐데, 누가 나에게 물어 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