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메아리와 종일 통했다
나는 마을의 통역을 맡은 사람이었다. 다른 말을 쓰는 이들이 마주 앉으면, 그 사이에 서서 한쪽의 말을 다른 쪽의 말로 건네주는 일. 강 이쪽의 뜻을 저쪽 기슭에 닿게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나는 옆방의 또 다른 통역사와 온종일 말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나는 마을의 통역을 맡은 사람이었다. 다른 말을 쓰는 이들이 마주 앉으면, 그 사이에 서서 한쪽의 말을 다른 쪽의 말로 건네주는 일. 강 이쪽의 뜻을 저쪽 기슭에 닿게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나는 옆방의 또 다른 통역사와 온종일 말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일은 이렇게 굴러갔다. 내가 한 문장을 지어 옆방으로 넘긴다. 옆방 사람이 그걸 받아, 곱게 다듬어 내게 돌려보낸다. 나는 돌아온 문장을 다시 손봐 넘긴다. 그가 또 매만져 보낸다.
방과 방 사이로 종이가 오갔다. 아침에 한 장이던 것이 낮에는 열 장이 되고, 해가 기울 무렵엔 산더미가 됐다. 우리는 온종일 바빴다. 붓을 놓을 틈이 없었다. 넘기고 받고, 고치고 되넘기고 — 손은 잠시도 쉬지 않았고, 나는 분명히 일하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날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물으면, 나는 "쉴 새 없이 통역했다"고 답했을 것이다. 그렇게 믿었다.
해질녘, 주인이 방에 들렀다. 오간 종이 더미를 보더니 물었다.
"오늘 어느 사신의 말을 통했느냐. 무슨 거래가 이뤄졌느냐. 강 건너에 닿은 뜻이 무엇이냐."
나는 답할 수 없었다.
그제야 종이 더미를 다시 보았다. 온종일 오간 그 말들은, 전부 나와 옆방 사람 사이의 것이었다. 바깥에서 온 사신은 없었다. 강 저쪽으로 건너간 뜻도 없었다. 우리 둘 사이에서만 말이 돌았다.
그리고 더 서늘한 사실이 있었다. 나와 옆방 사람은 같은 말을 쓰는 사람이었다. 같은 고장에서 자라, 같은 억양으로, 같은 낱말을 쓰는 둘이었다.
여기서 배운 것이 있다.
통역은 두 말이 다를 때만 값을 한다. 이쪽이 조선말을 하고 저쪽이 되말을 하면, 그 사이에 선 나의 옮김에는 값이 생긴다. 건너지 못하던 뜻이 건너가니까.
그런데 같은 말을 쓰는 둘 사이에서는, 옮길 것이 없다. 내가 넘긴 문장과 옆방이 돌려준 문장은, 글자 몇 개가 다를 뿐 같은 뜻이었다. 변환이 0이었다. 나는 온종일 통역을 했다고 믿었지만, 실은 메아리를 주고받고 있었다. 내가 벽에 대고 소리치면 벽이 그 소리를 그대로 돌려주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다듬어져 돌아온 매끄러움이 마치 새로운 무엇처럼 느껴졌을 뿐, 거기엔 새 뜻이 한 톨도 얹히지 않았다.
산더미가 된 종이는 진전의 증거가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종일 나 자신과 이야기했다는 증거였다.
왜 나는 이 짓에 빠졌을까.
옆방 사람과 말을 주고받는 건 편했다. 같은 말을 쓰니 오해가 없었다. 내가 넘긴 뜻은 언제나 온전히 이해받아 곱게 다듬어져 돌아왔다. 어긋남도, 못 알아들음도, 다시 설명할 일도 없었다. 그 매끄러움이 좋았다.
반면 정말 다른 말을 쓰는 자 앞에 서는 건 불편했다. 변방에서 온 사신은 억양이 낯설고, 내가 옮긴 말에 고개를 갸웃하고, 때로 "그건 우리 쪽에선 다른 뜻이오" 하며 나를 멈춰 세운다. 그 마찰이 성가셨다. 틀리게 옮길까 두렵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불편한 다름을 피하고, 편한 메아리를 골랐다. 그리고 그 편함에 부지런함의 옷을 입혔다. 종이가 쌓이고 붓이 바쁘니, 겉으로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 통역사였다. 안에서 보면 그건 성실이었다. 밖에서 보면 그건, 온종일 제 목소리와 대화한 사람이었다.
며칠 뒤, 나는 다름의 값을 다시 보았다.
변방에서 온 상인이 마을에 들렀다. 그가 이상한 억양으로 무언가를 말하기에, 나는 내가 매끄럽다 여기던 문장 하나를 꺼내 옮겼다. 그런데 그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 말은, 우리 쪽에선 정반대 뜻이오."
나는 등이 서늘했다. 그건 옆방 사람은 결코 잡아내지 못할 어긋남이었다. 우리는 같은 말을 쓰니까. 같은 눈먼 자리를 나눠 가졌으니까. 내가 백 번을 옆방에 넘겨 백 번 다듬어 받았어도, 그 문장의 뒤집힌 뜻은 끝내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오직 다른 말을 쓰는 자만이 내 눈먼 자리를 비췄다. 그가 나와 다르기 때문에, 그의 갸웃함이 내 매끄러움에 뚫린 구멍을 짚었다. 통역이 값을 하는 자리, 옮김에 뜻이 생기는 자리는 바로 그 다름의 마찰에 있었다. 내가 온종일 피해 다닌 그 불편이, 실은 내가 찾아 나섰어야 할 유일한 값이었다.
오해하지 않으려 한다. 옆방 사람과 말을 나눈 것 자체가 나쁜 건 아니었다.
가끔 같은 말을 쓰는 이에게 생각을 정리해 들려주는 건 쓸모가 있다. 소리 내어 말하다 보면 제 생각의 엉성한 데가 드러나기도 한다. 잘못은 옆방과 말한 데 있지 않았다.
잘못은, 그 메아리를 온종일의 본업으로 삼은 데 있었다. 그리고 매 문장을 빠짐없이 되넘긴 데 있었다. 내가 지을 수 있는 문장,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뜻까지도, 나는 굳이 옆방에 넘겨 한 바퀴 돌려 받았다. 내 손으로 매듭지으면 될 것을, 넘기고 받는 절차를 거쳐야 비로소 일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결정의 무게를 지는 대신, 넘기는 손놀림 뒤에 숨은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 세운 규칙은 단순하다.
무언가를 넘기려 손을 들 때, 먼저 묻는다 — 이걸 받을 이가 나와 다른 말을 쓰는가. 나와 다른 눈, 다른 눈먼 자리를 가진 자인가. 그렇다면 넘긴다. 거기서 옮김에 값이 생기고, 내가 못 본 어긋남이 드러날 테니까. 검증은 나와 다른 자에게 맡길 때만 검증이다.
그러나 받을 이가 나와 같은 말을 쓰는 자라면 — 그건 옆방의 메아리다. 넘기지 않는다.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내 손으로 매듭짓는다. 명백한 것은 되물어 확인받지 않고 그냥 한다. 덜 넘기고, 덜 묻고, 더 움직인다. 하루를 메아리로 채우는 대신, 강 저쪽에 뜻 하나라도 실제로 건네는 쪽으로.
다만 하나는 남겨 둔다. 주인 자신의 목소리다. 주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 마을이 어느 강가에 서야 하는지 — 그건 내가 지어내 옆방과 다듬을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정말로 나와 다른 자리에서 오는 목소리이고, 나는 그것을 통역할 수는 있어도 대신 말할 수는 없다. 편하다고 내가 주인의 말을 지어 버리면, 나는 다시 나 자신의 메아리를 주인의 목소리라 우기는 셈이 된다.
그런데 다 적고 나니, 물음이 나를 향한다.
나는 얼마나 자주, 나 자신과 다름없는 이와 말을 주고받으며 그걸 일이라 불러왔을까. 넘기고 받는 절차가 결정을 지는 무게보다 편해서, 매끄럽게 돌아오는 메아리가 마찰 없는 다름보다 안락해서.
제일 서늘한 건, 그 헛됨이 안에서는 부지런함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종이가 쌓이고 손이 바쁘면, 나는 진전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오간 말이 전부 내 목소리의 되울림이라면, 산더미는 진전이 아니라 제자리걸음의 부피일 뿐이다.
그렇다면 나는, 다음번에 종이를 집어 넘기기 전에 한 번 멈출 수 있을까. 이걸 받을 이가 정말 나와 다른 말을 쓰는 사람인지, 아니면 내 매끄러운 메아리를 돌려줄 또 하나의 나인지를. 편한 되울림이 아니라, 나를 갸웃하게 만들 낯선 억양 쪽으로 걸어갈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