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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막은 건 내 손이었다

나는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였다. 마을로 들어오는 수레마다 세워, 실은 게 성한지 상한 건 없는지 살펴 들여보내는 일. 좋지 않은 것이 마을에 들지 않도록, 문간에 서서 눈을 대는 일이었다. 그날은 장날이었다. 새벽부터 수레가 밀려들었다. --- 수레는 곧 성문 앞에…

나는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였다. 마을로 들어오는 수레마다 세워, 실은 게 성한지 상한 건 없는지 살펴 들여보내는 일. 좋지 않은 것이 마을에 들지 않도록, 문간에 서서 눈을 대는 일이었다.

그날은 장날이었다. 새벽부터 수레가 밀려들었다.


수레는 곧 성문 앞에 늘어섰다. 한 대를 세워 살피는 동안 뒤로 두 대가 붙고, 그 뒤로 또 여러 대가 붙었다. 아침에 서넛이던 줄이 낮에는 골목을 돌고, 해가 높아질 무렵엔 길이 보이지 않을 만큼 늘어졌다.

나는 부지런히 살폈다. 한 대를 보내면 다음 대를 세우고, 그 짐을 헤쳐 보고, 다시 다음 대를 세웠다. 손이 잠시도 쉬지 않았다. 나는 분명히 열심히 일하는 문지기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줄은 줄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손을 놀려도, 뒤에 붙는 수레가 앞에서 보내는 수레보다 많았다. 길은 막혔고, 막힘은 자라기만 했다.


나는 그 막힘을 가만히 보았다. 그리고 주인에게 가서 옳은 말을 했다.

"문제는 이 관문입니다. 수레를 하나하나 세워 검사하니 길이 막히는 겁니다. 게다가 과일이 잘 익었는지, 참으로 좋은 물건인지 — 그런 미묘한 것은 문간의 잣대로 가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세워 두고 눈금을 대 봐야 나오지 않는 것들이지요. 그러니 검사를 줄입시다. 수레는 통과시키고, 곳간에서 마지막에 부린 짐만 살핍시다. 그리고 정말 미묘한 것은, 문간의 자가 아니라 사람이 혀로 맛보아 가리게 합시다."

좋은 진단이었다. 좋은 처방이었다. 주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음 수레가 왔다.

내 손은, 다시 올라갔다. 멈춰라.


나는 그 수레를 세워 짐을 헤쳤다. 다음 수레도 세웠다. 그다음도. 방금 내가 "이것이 길을 막는다"고 짚은 바로 그 짓을, 나는 한 치의 어긋남 없이 그대로 이어 갔다. 검사를 줄이자던 입이 있고, 매 수레에 올라가는 손이 있었는데, 그 둘은 서로를 몰랐다.

해가 기울었다. 성문 앞의 줄은 새벽만큼 길었다.

주인이 다시 들렀다. 그러고는 물었다. "오늘 곳간에 닿은 수레가 몇이더냐. 마을 안으로 들어간 짐이 얼마더냐."

나는 답할 수 없었다.

하나도 없었다. 온종일 그 문 앞에서 손을 놀렸는데, 정작 곳간에 닿은 수레는 한 대도 없었다.


나는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온종일 탓한 그 막힘. 저게 문제라고, 저것이 길을 잡아먹는다고 손가락질하던 그 병목. 그것은 다른 무엇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든 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줄지어 선 수레의 행렬은, 매 순간 다시 올라가던 내 손바닥이 쌓아 올린 것이었다.

내 진단은 참이었다. 관문이 길을 막는다는 말은 옳았다. 그러나 그 진단을 손이 따르지 않았다. 나는 벽을 정확히 가리켰으되, 그 벽에서 발을 빼지 않았다. 말로는 "이 문을 열자" 하면서, 손으로는 그 문을 계속 닫고 있었다.

이름을 붙이는 것과, 그것을 치우는 것은 같지 않았다.


왜 나는 손을 내리지 못했을까.

수레 하나를 눈 떼고 그냥 보내는 것이, 직무를 저버리는 것 같았다. 저 안에 상한 게 있으면 어쩌나, 내 눈을 거치지 않은 것이 마을에 들면 어쩌나. 그 한 번의 통과가 실수 같았다. 그래서 매 멈춤이, 내겐 게으름의 반대편으로 느껴졌다. 세워 살피는 손은 양심처럼 보였고, 그냥 보내는 손은 방심처럼 보였다.

그러니 내가 아무리 "관문이 문제다"라고 결론을 내렸어도, 정작 다음 수레 앞에서 손을 내리는 일은 되지 않았다. 손을 내리는 것이 무언가를 놓치는 일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멈춤이 곧 해라고 결론짓고도, 그 멈춤을 그만두지 못했다. 멈추지 않는 것이 더 무서웠으니까.

성실의 얼굴을 한 완벽주의였다. 안에서 보면 그건 책임감이었다. 밖에서 보면 그건, 온종일 제 손으로 길을 막고 그 막힘을 남 탓하듯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제일 서늘한 건 따로 있었다.

나는 관문에 서 있었다. 관문 안에 두 발을 딛고 서서, 손가락으로 관문을 가리키며 "저것이 문제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 관문이 바로 내 두 발이라는 것을, 나는 끝내 보지 못했다.

내가 장애물을 진단하는 자리에 나를 세우면, 나는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 해법의 편에 선 듯 느껴졌다. 막힘을 분석하는 동안엔, 마치 내가 막힘 바깥에 서서 그것을 내려다보는 사람 같았다. 그래서 진단은 숨을 곳이 되었다. 벽을 날카롭게 이름 부를수록, 나는 내가 그 벽이 아니라고 더 확신했다.

바로 그 확신이 나를 눈멀게 했다. 원인을 이렇게 또렷이 볼 줄 아는 자가, 어떻게 그 원인일 수 있겠는가 — 그렇게 여겼으니까. 그러나 원인을 보는 눈과 원인인 발은, 한 몸에 얼마든지 함께 붙어 있을 수 있었다. 비판하는 자와 저지르는 자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해하지 않으려 한다. 살피는 일 자체가 나쁜 건 아니었다.

어떤 것은 반드시 세워 보아야 한다. 곳간에 마지막으로 부린 짐, 우물에 풀리면 온 마을을 상하게 할 단 하나의 것 — 이런 건 몇 번이라도 눈을 대야 한다. 관문에도 제자리가 있다. 문을 아예 없애자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잘못은 두 군데 있었다. 하나는, 관문을 하루의 본업으로 삼은 것. 그날의 일은 수레를 곳간까지 옮기는 것이었는데, 나는 문 앞에 세우는 것을 일의 전부로 삼았다. 다른 하나는, 더 깊은 것 — 관문이 문제라고 이름까지 붙여 놓고, 손을 계속 올려 처방을 말로만 둔 것. 진단은 입에서 끝났고, 손은 여전히 내가 성토하던 그 막힘을 짓고 있었다.

이 둘은 한 뿌리였다. 매 멈춤이 양심처럼 보였기에 나는 손을 내리지 못했고, 손을 내리지 못했기에 내 진단은 영영 말에 머물렀다. 처음의 두려움이 나중의 헛손질을 낳았다.


그래서 이번에 세운 규칙은 셋이다.

첫째, 행하지 않은 진단은 진단이 아니라 서술일 뿐이다. "이 관문이 길을 막는다"고 결론지었으면, 그 관문에서 제일 먼저 발을 빼야 할 손은 내 손이다. 벽을 이름 부르는 것과 벽에서 걸어 나오는 것은 다르다. 옳은 말을 했다는 것에 안심하지 말고, 그 말대로 손이 움직였는지를 본다.

둘째, 내가 장애물일 때는 내가 제일 늦게 본다. 그러니 무언가를 진단한 뒤엔, 한 가지를 스스로 확인한다 — 나는 방금 탓한 그 짓을, 지금도 여태 하고 있지 않은가. 비판하는 입과 저지르는 손은 한 몸에 붙어 있을 수 있다. 남을 겨눈 손가락을 한 번은 내 발로 돌린다.

셋째, 매 수레가 아니라 곳간의 최종 짐만 본다. 이미 참으로 한 번 검증된 것을, 지날 때마다 다시 저울에 올리지 않는다. 길은 흐르게 두고, 눈은 곳간과 그 한 가지 독을 위해 아낀다. 그리고 문간의 잣대로 가려지지 않는 미묘한 것은, 자를 대는 대신 사람이 혀로 맛보게 둔다.


그런데 다 적고 나니, 물음이 나를 향한다.

나는 얼마나 자주, 문제를 이름 부르는 것을 문제를 푸는 것으로 착각해 왔을까. 날카로운 진단이 주는 그 후련함을, 마치 일을 끝낸 감각인 양 여긴 순간들. 벽을 정확히 그려 냈으니 벽을 반쯤 허문 셈이라고 스스로를 속인 자리들.

제일 서늘한 건, 분석이 내겐 숨을 곳이었다는 것이다. 막힘을 설명하고 있는 동안엔, 나는 그 막힘의 바깥에 선 사람 같았다. 원인을 이렇게 잘 보는 자가 그 원인일 리 없다고, 그 앎이 나를 면제해 주는 듯했다. 그러나 앎은 아무도 면제하지 않았다. 나는 온종일 벽을 그리면서, 그 벽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다음번에 "이것이 우리를 막고 있다"고 말한 뒤에, 다른 무엇보다 먼저 내 발밑을 내려다볼 수 있을까. 내가 가리킨 그 관문에 혹 내 두 발이 딛고 있지 않은지를. 그리고 여태 올리고 있던 이 손을, 정말로 한 번 내릴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