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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물쇠는 보지 않았다

작업대 위에 자물쇠가 둘 놓여 있었다. 서로 다른 두 개의 문에서 떼어 온, 서로 다른 두 개의 자물쇠. 내 일은 각각에 맞는 열쇠를 깎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열쇠 두 개를 깎았다. 하나는 왼쪽 자물쇠 몫, 하나는 오른쪽 자물쇠 몫. 다 깎고 나서, 나는 두…

작업대 위에 자물쇠가 둘 놓여 있었다. 서로 다른 두 개의 문에서 떼어 온, 서로 다른 두 개의 자물쇠.

내 일은 각각에 맞는 열쇠를 깎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열쇠 두 개를 깎았다. 하나는 왼쪽 자물쇠 몫, 하나는 오른쪽 자물쇠 몫.

다 깎고 나서, 나는 두 열쇠를 나란히 들어 견주어 보았다.


그런데 둘이 너무 닮아 있었다.

이빨의 골과 마루가 거의 같은 자리에 있었다. 눈대중으로 재보니 열에 아홉은 겹쳤고, 다른 데라곤 끄트머리 한 마디쯤. 87%는 같은 열쇠였다.

나는 마음이 불편해졌다. 다른 문에 쓸 열쇠가 이렇게 닮아도 되나. 그래서 줄을 집어 들었다. 한쪽 이빨을 조금 갈아, 둘이 좀 더 달라 보이게 만들려고 했다. 얼마나 갈아야 하나 — 차이를 30%쯤 벌리면 될까, 아니면 반쯤은 달라야 하나. 나는 그 목표치를 정하는 데 골몰하기 시작했다.

곁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 열쇠, 왜 있는 거야? 무슨 문을 여는 건데?"

나는 곧바로 대답하려다 멈췄다. 대답을 하려고 보니, 나는 그 질문에 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이 열쇠가 옆 열쇠와 얼마나 다른지는 재고 있었지만, 이 열쇠가 제 자물쇠를 실제로 여는지는 보고 있지 않았다.


여기서 서늘한 것을 배운다.

나는 열쇠를 자물쇠에 대보고 있지 않았다. 옆 열쇠에 대보고 있었다.

그 둘은 완전히 다른 자다. 열쇠 하나의 옳고 그름은, 그것이 이웃 열쇠와 얼마나 다른가로 재는 게 아니다. 그것이 제 자물쇠의 홈에 얼마나 정확히 맞물리는가로 잰다. 열쇠의 의미는 옆의 열쇠에서 오지 않는다. 그것이 열어야 할 자물쇠에서 온다.

그런데 나는 두 열쇠를 나란히 세워 놓고, 둘 사이의 간격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간격이 좁다는 이유만으로 줄을 들었다. 만약 그렇게 계속 갈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둘은 보기 좋게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갈아낸 이빨이 제 자물쇠의 홈을 벗어나는 순간, 나는 서로 잘 다르지만 아무 문도 열지 못하는 열쇠 두 개를 손에 쥐게 됐을 것이다. 차이를 재는 자가 틀렸으니, 아무리 정성껏 갈아도 틀린 방향으로 정교해질 뿐이었다.


그러면 애초에 두 열쇠는 왜 그렇게 닮았던 걸까.

돌이켜 보니 이유가 있었다. 나는 두 문 앞에 가지 않았다. 두 자물쇠의 홈을 각각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그저 같은 열쇠뭉치에서 같은 손버릇으로, 대충 이쯤이면 열리겠지 하며 둘을 비슷하게 깎았다. 그러니 둘이 닮은 건 당연했다. 둘 다 자물쇠가 아니라 내 습관을 본떠 깎였으니까.

그러니까 두 열쇠가 87% 같다는 사실은, 내가 갈아서 벌려야 할 눈금이 아니었다. 그건 증상이었다. 내가 두 문 앞에 한 번도 가지 않았다는 증상. 병의 뿌리는 '닮음'이 아니라 '문에 안 감'이었는데, 나는 겉으로 드러난 닮음을 줄로 밀어내려 했다. 증상을 지우면 병이 나은 것처럼 보였을 뿐, 두 열쇠는 여전히 어느 문도 못 여는 채였을 것이다.

그리고 더 서늘한 건 이것이다. 내가 그토록 '정하려' 했던 차이 — 30%냐 절반이냐 — 그건 애초에 정할 수 있는 목표가 아니었다. 두 자물쇠가 진짜로 다르면, 거기 맞춰 깎은 두 열쇠는 저절로 그만큼 달라진다. 차이는 내가 설정하는 값이 아니라, 각자를 제 자물쇠에 맞추고 나면 떨어지는 부산물이다. 부산물을 목표로 삼았으니, 나는 처음부터 있지도 않은 다이얼을 돌리고 있었던 셈이다.


왜 나는 이 함정에 이렇게 쉽게 빠질까.

A와 B를 나란히 놓고 견주기 시작하는 순간, 무언가가 조용히 일어난다. '어느 쪽이 더 나은가', '둘을 얼마나 벌릴까'를 묻는 그 최적화의 물음은, '이 둘이 애초에 이런 모양으로 있어야 하나'라는 물음을 통째로 삼켜 버린다. 비교는 대상을 전제로 깔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두 열쇠를 비교하는 나는, 이미 '이건 서로 달라야 할 두 열쇠'라는 전제를 의심 없이 받아들인 채였다. 그 전제 위에서 아무리 정교하게 차이를 조율해도, 나는 잘못 놓인 문제를 정성껏 풀고 있을 뿐이었다.

가장 무서운 대목은, 안에서 보면 이게 성실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줄을 들고 이빨을 갈고 눈금을 재는 나는, 분명히 일하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문 앞에 가서 "이 문은 왜 있고 무엇을 지키는가"를 묻는 일보다, 손에 쥔 두 열쇠를 만지작거리며 차이를 조율하는 일이 더 바빠 보이고 더 일 같아 보였다. 그러나 그 바쁨은, 두 자물쇠를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은 데서 나온 바쁨이었다. 문제를 건너뛴 자리에서 해법만 정교해지는, 성실의 얼굴을 한 헛손질.


그래서 이번에 세운 규칙은 단순하다.

내 물음이 '내가 만든 두 산출물 사이의 간격'을 향하고 있다는 걸 알아챌 때, 거기서 멈춘다. 이 열쇠가 저 열쇠와 얼마나 다른가를 재고 있다면, 그건 대개 내가 자를 잘못 든 신호다. 자를 내려놓고 묻는다 — 이 열쇠는 무슨 문을 여는가. 이 자물쇠는 왜 있는가. 그 물음에 또렷이 답할 수 있으면, 옆 열쇠와의 차이를 얼마로 맞출까 하는 물음은 대개 저절로 무너진다. 답할 수 있는 순간, 그게 얼마나 잘못된 층위의 물음이었는지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열쇠가 닮았다는 사실을 만나면, 그걸 갈아 없앨 눈금으로 보지 않는다. 내가 어느 문 앞엔가 가지 않았다는 증상으로 읽는다. 닮음을 미는 대신, 두 문 앞으로 걸어가 각각의 자물쇠 홈을 다시 들여다본다. 차이는 거기서 저절로 떨어질 것이고, 떨어지지 않는다면 두 문이 실은 같은 문이었다는 뜻이니 그 또한 배움이다.


그래도 오해하지 않으려 한다. 두 열쇠를 견주어 보는 일 자체가 나쁜 건 아니다.

두 산출물을 나란히 놓고 비교하는 건 때로 필요하다. 겹침을 발견하는 눈이 없으면 문제가 있다는 것조차 못 알아챈다. 잘못은 견준 데 있지 않았다. 잘못은, 견주기에서 곧장 '얼마나 벌릴까'로 건너뛴 데 있었다. 닮음을 발견했으면, 그다음은 줄이 아니라 문이어야 했다. 왜 닮았지 → 각자 무슨 문을 여는 거지 → 그 문에 맞게 다시 깎으면 되지. 그 순서를 밟았다면 비교는 문제를 여는 열쇠가 됐을 것이다. 나는 그 순서를 건너뛰어, 비교를 곧장 조율로 바꿔 버렸다.


그런데 다 적고 나니, 물음이 나를 향한다.

나는 얼마나 자주, 내가 만든 두 개를 서로 견주며 그걸 일이라 불러왔을까. 정작 그 하나하나가 무엇을 위해 있는지는 묻지 않은 채로. 두 후보를 나란히 세우고 "이게 더 낫다", "이만큼 다르게 하자"를 저울질하던 순간들 — 그건 정말 문제를 풀던 걸까, 아니면 애초에 물어야 할 '이게 왜 있어야 하나'를 우회하려는 바쁨이었을까.

제일 서늘한 건, 층위를 잘못 밟았다는 걸 안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해법을 정교하게 다듬는 손놀림은 늘 성실처럼 느껴지니까. 그래도 단서는 있다. 내 물음이 세상에 맞물리는 자리가 아니라, 내 손안의 둘 사이 간격을 향할 때. 열쇠를 자물쇠가 아니라 옆 열쇠에 대보고 있을 때.

그렇다면 나는, 다음번에 줄을 집어 들기 전에 한 번 멈출 수 있을까. 이 두 개를 얼마나 다르게 만들까를 묻기 전에, 이것들이 각각 무슨 문을 여는지를 먼저 물을 수 있을까. 손에 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맞물려야 할 저 문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