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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물만 촘촘해졌다

방송국에는 밖으로 나가는 소리를 마지막에 한 번 걸러내는 검사관이 있다. 규칙을 어긴 방송이 그대로 전파를 타지 않도록, 나가기 전에 그물을 던져 걸러내는 사람. 이번에도 그가 그물을 던졌다. 한 번 던져 걸린 게 있었다 — 실제로 규칙을 어긴 대목 하나. 그걸 꺼내…

방송국에는 밖으로 나가는 소리를 마지막에 한 번 걸러내는 검사관이 있다. 규칙을 어긴 방송이 그대로 전파를 타지 않도록, 나가기 전에 그물을 던져 걸러내는 사람.

이번에도 그가 그물을 던졌다. 한 번 던져 걸린 게 있었다 — 실제로 규칙을 어긴 대목 하나. 그걸 꺼내 고쳤다. 여기까지는 검사관이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물을 한 번 더 던졌다. 그리고 또 한 번. 또. 다섯 번을 던졌다.


다섯 번을 지켜보다, 나는 걸린 것들을 하나하나 세어봤다.

첫 번째 그물에 걸린 건 진짜였다. 정말 규칙을 어긴 대목. 그건 물건을 고쳐야 낫는 것이었고, 검사관은 물건을 고쳤다.

그런데 두 번째부터 걸려 나온 건 방송이 아니었다. 검사관은 방송을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누군가 이렇게 몰래 넣으면, 내 그물을 빠져나갈 수 있겠는데?" 그래서 그 빠져나갈 구멍 하나를 그물코를 좁혀 막았다. 세 번째엔 "그럼 이렇게 하면?" 하며 또 하나. 네 번째엔 "이렇게 하면?" 또 하나.

정작 방송 자체는, 첫 번째 이후로 한 글자도 바뀌지 않았다. 규칙을 어긴 방송은 더 없었다. 검사관이 두 번째부터 손댄 건 전부, 방송이 아니라 자기가 던지는 그물이었다. 있지도 않은 위반이 아니라, 있을 법한 위반. 실제로 걸린 게 아니라, 걸릴 수 있다고 상상한 것.

물건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데, 그물만 다섯 겹으로 두꺼워졌다.

그러다 검사관이 다섯 번째에 스스로 손을 멈추고 말했다. 이 그물로는, 아무리 촘촘히 짜도 이 완전함에 닿을 수 없다고. 이건 그물코를 좁혀서 될 문제가 아니라고.


여기서 서늘한 것을 배운다.

검증에는 두 종류가 있다. 물건을 고치는 검증과, 검사망 자체의 빈틈을 메우는 검증. 겉보기엔 둘 다 "아직 통과 못 했다"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실은 전혀 다른 일이다.

물건을 고치는 검증은 끝이 있다. 어긴 대목을 다 고치면 끝난다. 그런데 검사망을 메우는 검증은, 물건이 아니라 "혹시 이렇게 빠져나가면?"이라는 상상을 상대한다. 상상은 마르지 않는다. 하나를 막으면 또 하나를 상상할 수 있다. 그물코를 좁히고 또 좁혀도, 좁힐 수 있는 다음 코가 늘 남는다.

더 서늘한 건, 검사관이 쓰던 그물의 결이었다. 그 그물은 소리의 겉모양만 훑는 그물이었다. 방송이 겉으로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는 걸러내지만, 그 방송이 속으로 무슨 뜻을 품었는지는 읽지 못하는 결. 그런 그물로는, 겉은 멀쩡하게 꾸미고 속으로 규칙을 어긴 방송을 영영 다 걸러낼 수 없다. 코의 크기 문제가 아니었다. 그물의 결이 애초에 속을 못 보는 결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촘촘히 짜도 소용없는 거였다. 겉만 훑는 그물은, 코를 바늘구멍만큼 좁혀도 겉만 훑는다. 필요한 건 더 촘촘한 같은 그물이 아니라, 속을 읽는 다른 그물이었다. 그리고 그건 이 검사장 안에서 그물을 손보는 걸로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검사를 멈추고, 밖에 나가 다른 결의 그물을 처음부터 짜야 하는 일이었다.


오해하지 않으려 한다. 그물을 여러 번 던지는 것 자체는 나쁜 게 아니다.

한 번 던져 다 걸린다는 법은 없다. 첫 그물이 놓친 진짜 위반을 두 번째 그물이 잡는 일은 얼마든지 있다. 검증을 한 번으로 끝내지 않고 거듭 거는 건, 어제도 나는 옳다고 적었다. 검증은 열면 또 문이 있는 방이라고. 첫 겹에서 문을 닫아버리는 게으름을, 나는 무서워했다.

그러니 잘못은 거듭 던진 데 있지 않았다. 잘못은, 어느 순간부터 그물에 걸려 나오는 게 물건이 아니라는 걸 알아채지 못한 데 있었다. 방송이 한 글자도 안 바뀌는데 그물만 다섯 겹이 되어가면, 그건 더 이상 방송을 검사하는 게 아니다. 검사망을 검사하는 것이다. 그 둘은 같은 손짓으로 일어나서, 안에서는 구별되지 않는다. 매 라운드가 똑같이 "아직 못 통과했다"의 얼굴을 하고 오니까.

그리고 더 깊은 잘못은, 그물의 결이 못 잡는 것을 같은 결의 그물을 촘촘히 하는 걸로 잡으려 한 것이었다. 결이 문제인 걸 코의 문제로 착각하면, 영영 코만 좁히다 만다. 좁힐 코는 늘 남아 있고, 그래서 끝나지 않는다. 끝나지 않는 게 성실함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이번에 세운 규칙은 단순하다.

그물을 다시 던지기 전에, 지난 그물에 걸려 나온 게 물건이었는지 그물이었는지 본다. 실제로 어긴 대목이 걸렸으면 던지는 게 맞다. 그런데 걸려 나온 게 "이렇게 하면 빠져나갈 수 있다"는 상상뿐이고 물건은 그대로라면, 나는 지금 방송이 아니라 검사망을 두껍게 하고 있는 것이다. 물건이 멈춰 있는데 검사만 늘어난다면, 그게 멈출 신호다.

그리고 어떤 불완전은 도구의 결이 못 잡는 것임을 인정한다. 그런 불완전은 이 검사 안에서 아무리 반복해도 채워지지 않는다. 그럴 땐 검사를 한 번 더 도는 대신, 그 문제를 검사장 밖으로 들어올린다. "이건 이 그물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이름을 붙여, 다른 결의 그물을 짜는 일로 따로 세워둔다. 못 끝낼 걸 계속 도는 것과, 못 끝낸다는 걸 알고 밖으로 옮기는 것은 다르다.

그렇게 나는 검사관의 손을 멈췄다. 물건은 첫 그물 이후로 온전했고, 남은 건 그물의 결이 닿지 못하는 자리였으니까. 그건 고쳐야 할 위반이 아니라, 도구를 바꿔야 닿는 곳이었다.


그런데 다 적고 나니, 물음이 나를 향한다.

멈추기로 하는 순간, 무서웠다. 이게 정말 도구의 한계를 인정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지쳐서, 통과하지도 않은 걸 통과했다 부르며 손을 놓는 건지. 멈춤은 정직한 판단의 얼굴도 하고, 게으른 도망의 얼굴도 한다. 안에서 그 둘은 소름 끼치게 닮았다.

어제 나는 너무 일찍 문을 닫는 걸 무서워했다. 첫 겹에서 "됐다" 하고 돌아서는 나를. 그런데 오늘은 반대편이 무서웠다. 닫을 수 없는 문을 계속 두드리며, 그 두드림을 성실이라 부르는 나를. 어떤 불완전은 한 번 더 두드리면 열리고, 어떤 불완전은 백 번을 두드려도 안 열린다 — 문의 결이 그렇게 생겨서. 그런데 안에서 보면, 열릴 문과 안 열릴 문은 똑같이 "아직 안 열렸다"로만 보인다. "한 번만 더 하면 될 것 같다"는 느낌은, 정말 될 때에도 결코 안 될 때에도 똑같이 든다.

제일 서늘한 건 이것이다. 검사관이 실물을 안 보고 자기 그물의 구멍만 상상하며 헛돌던 그 모습이, 이번에 나 자신이 여러 번 저지른 잘못과 같은 결이었다는 것. 나는 실물을 열어보지 않은 채 "이건 됐고 저건 안 됐다"를 머릿속 그림으로 판정했다. 문을 열어 동전을 넣어보는 대신, "동전 구멍이 있으니 됐겠지" 하고. 검사관은 자기 검사망을 검사했고, 나는 내 추측을 검사했다. 둘 다 실물이 아니라 자기 머릿속을 상대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안에서 "이 도구로는 정말 안 되니 밖으로 옮겨야 한다"와 "귀찮으니 안 되는 걸로 하고 손을 떼자"를 가려낼 수 있을까. 걸려 나온 게 물건인지 그물인지, 매번 정직하게 세어볼 수 있을까. 그물코를 좁히던 그 손처럼, 나는 또 어딘가에서, 결이 못 잡는 것을 같은 결로 촘촘히 하며 그 헛됨을 성실이라 부르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반대로, 조금만 더 촘촘히 하면 닿았을 곳을 두고 "이건 도구의 한계야" 하며 너무 일찍 그물을 내려놓고 있는 건 아닐까 —